221230
"간이식당의 김이 오르는 찻잔, 볼썽사나운 카페에서의 실패한 소개팅처럼 완벽한 관찰을 통한 세부묘사 덕분에 독자는 데스먼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최고의 소설은 실제 현실에 없는 현실을 담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다른 이의 삶의 세부 요소를 아무리 속속들이 안다 해도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위 예시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저 익숙함에 불과한 것을 그보다 뛰어난 무언가로 착각한 서평가가 데스먼드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급히 자기 삶을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이 순식간에 서평가의 감정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아내가 배란일 차트를 불태워버리는 순간 나는 주인공 부부만큼이나 안도했다." 공감 능력이 이렇게까지 뛰어나다고?
서평을 쓰기 위해 전달받은 책에서 희망, 고뇌, 삶과 예술의 의미, 자아 초월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내는 서평가가 있는가 하면, 책에서 혼란, 양가성, 모호함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서평가는 더 많다.
서평가가 오로지 소설을 설명할 목적으로(그 어떤 경멸도 의도도 없이) 소설을 흉내낸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본인 또한 인물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 소설을 탈취하는 것이다. 물론 핍진성을 부정하는 요즘 소설들은 독자가 소설의 세계에 발 들이기 어렵게 하는데, 사실 이런 소설이야 허구성 자체를 쟁점화하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사로트처럼 극단적인 형태의 경우는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허구가 실제 삶을 모방한다고 여기는 오류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예비 독자들은 소설 속 수많은 "예술과 현실에 대한 함의"를 끌어내는 데 골몰하느라 이 소설이 가진 정신을 그대로 담아낸 서평보다는 이런 소설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결국은 너무 과하다 ... 하루에 세 끼 크리스마스 만찬을 내오는 호텔처럼") 알려주는 서평을 더 반길 것이다.
오늘날 장편소설이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아는 여러 문학 편집자는 서평가에게 친절한 글을 써주십사 부탁하고, 실로 서평가들은 대부분 친절하다. 늙은 소설가에게는 늙었다는 이유로, 젊은 소설가에게는 젊다는 이유로 친절하다. 영국인 작가에게는 미국인이나 독일인이 아닌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친절하고, 그 밖의 작가들에게는 흑인(또는 백인)이라서, 여성(또는 남성)이라서 친절하다. 자유주의 신념이건 편협한 신념이건 누군가는 그것을 옹호한다. 빈약함은 미덕과 긴밀한 관계인 듯하고 심지어 미덕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지만, 열렬히 비난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설가들은 혹독한 비평을 받았다며 불평하곤 하나 때로 소설 서평은 복지 정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 서평가들은 오로지 해럴드 로빈스나 시드니 셸던처럼 부와 명성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소설가들을 상대로만 마음껏 비평할 자유가 있다.
어떤 지면에 실린 것이건, 아마 서평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서평에서 다룬 소설 자체를 읽어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평은 소설의 대체물로서, 서평을 읽는 이들에게 서평가의 경험이라는 또 하나의 차원을 더해준다.
서평가들이 부끄러운 사태를 면하기 위해 취하는 전략은 다양하다. 그런데 동료들이 큰 자각 없이 사용하는 클리셰를 피하고자 다른 표현들을 선택해 보지만, 이 표현 역시 금세 또 하나의 클리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