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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30. 2022

서평가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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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 일찍 메리케이 윌머스의 단편 에세이 모음집 <서평의 언어>었다. 서평가들의 공동묘지에 참배온 기분이었다. 표제작인 '서평의 언어'는 일종의 메타 서평으로, 저자가 다양한 소설 서평을 읽은 뒤 분석한 글이다. 메리케이는 자신이 본 서평을 과감히 유형화하고 비꼰다. 한국어판으로 21페이지 길이 짧은 글에 여러 서평가의 글이 난도질당한 채 널브러져 있다. 


<서평의 언어>(메리케이 윌머스) 한국어판 표지


  서평가는 창작물을 해석할 최종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일부는 기능론적(분업의 체계랄까)이고 어느 정도는 경제적인 이유(작가는 비판받는 대신 돈을 벌고, 서평가는 손가락질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부와 명예를 아껴 받는다)로 알려져 있다. 메리케이는 그 생각이 착각이라고 '짤없이' 두들겨 팬다. 아마도 서평가로서 메리케이 자신의 직업윤리 때문일 것이다. 친구랑 감상을 나눈다면 모를까, 공적인 지면에 무언가를 평가할 때는 책임감을 갖고 써야한다. 지만 충 '몰입했다'며 공감을 표하고 끝내는 서평이 너무 많다. 메리케이는 말한다.


"간이식당의 김이 오르는 찻잔, 볼썽사나운 카페에서의 실패한 소개팅처럼 완벽한 관찰을 통한 세부묘사 덕분에 독자는 데스먼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최고의 소설은 실제 현실에 없는 현실을 담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다른 이의 삶의 세부 요소를 아무리 속속들이 안다 해도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위 예시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저 익숙함에 불과한 것을 그보다 뛰어난 무언가로 착각한 서평가가 데스먼드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급히 자기 삶을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이 순식간에 서평가의 감정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아내가 배란일 차트를 불태워버리는 순간 나는 주인공 부부만큼이나 안도했다." 공감 능력이 이렇게까지 뛰어나다고?


  위 문단에서 메리케이는 두 가지를 동시에 주장한다. 소설 속 인물의 상황, 또는 감정에 섣불리 공감하는 서평가는 믿기 어렵다. 그렇다면 잘 쓴 소설의 경우는 공감이 더 용이한가. 아무리 생생하게 쓰인 소설이라도 독자가 '내 일'처럼 받아들이는 일은 제한적으로 벌어진다. 메리케이의 1차 타격 지점은 '핍진성'만을 숭배하는 일군의 서평이다.

  그러면서도 메리케이는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더이상 거침없는 핍진성을 기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소설을 상찬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고 지적한다. 핍진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칭찬의 근거가 될 수 없듯, 핍진성의 부재도 '빨아주는' 이유가 돼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전달받은 책에서 희망, 고뇌, 삶과 예술의 의미, 자아 초월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내는 서평가가 있는가 하면, 책에서 혼란, 양가성, 모호함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서평가는 더 많다.


  이 대목에서 메리케이는 소설가와 서평가 모두에게 저마다의 직업윤리를 요구하는 교사처럼 보인다. 다만 단편 제목이 '서평의 언어'인 만큼 서평가 쪽에 더 날을 세운다. 소설가는 자기 구상을 정확히 이해한 채 전략적으로 서사와 언어를 구축하는데, 서평가가 엉뚱한 글을 쓰는 경우를 그는 경계한다.


서평가가 오로지 소설을 설명할 목적으로(그 어떤 경멸도 의도도 없이) 소설을 흉내낸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본인 또한 인물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 소설을 탈취하는 것이다. 물론 핍진성을 부정하는 요즘 소설들은 독자가 소설의 세계에 발 들이기 어렵게 하는데, 사실 이런 소설이야 허구성 자체를 쟁점화하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사로트처럼 극단적인 형태의 경우는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허구가 실제 삶을 모방한다고 여기는 오류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메리케이의 글이 저격하는 또 하나 대상은 독자다. 단선적 서사를 뒤틀고 플롯을 사방팔방 늘어놓으며 시점을 혼란스럼게 만드는 일부 '현대' 소설을 서평가가 정성껏 읽고 쓴대도, 독자의 외면을 받으면 피로와 억하심정만 남을 것이다. 메리케이는 독자들의 수준을 냉소하는 엘리트처럼 말한다.


예비 독자들은 소설 속 수많은 "예술과 현실에 대한 함의"를 끌어내는 데 골몰하느라 이 소설이 가진 정신을 그대로 담아낸 서평보다는 이런 소설을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결국은 너무 과하다 ... 하루에 세 끼 크리스마스 만찬을 내오는 호텔처럼") 알려주는 서평을 더 반길 것이다.


  독서 시장의 상황도 서평가의 날카로운 손짓을 묶는 족쇄다. 이 문단에선 요즘의 출판 및 비평 시장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쩐지 요즘은 부와 명성을 두루 갖춘 이들에 대해 비평이 더 힘을 못쓰는 듯하지만, 그래서 평가라는 행위가 무가치해진 것 같지만.


오늘날 장편소설이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아는 여러 문학 편집자는 서평가에게 친절한 글을 써주십사 부탁하고, 실로 서평가들은 대부분 친절하다. 늙은 소설가에게는 늙었다는 이유로, 젊은 소설가에게는 젊다는 이유로 친절하다. 영국인 작가에게는 미국인이나 독일인이 아닌 영국인이라는 이유로 친절하고, 그 밖의 작가들에게는 흑인(또는 백인)이라서, 여성(또는 남성)이라서 친절하다. 자유주의 신념이건 편협한 신념이건 누군가는 그것을 옹호한다. 빈약함은 미덕과 긴밀한 관계인 듯하고 심지어 미덕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지만, 열렬히 비난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설가들은 혹독한 비평을 받았다며 불평하곤 하나 때로 소설 서평은 복지 정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 서평가들은 오로지 해럴드 로빈스나 시드니 셸던처럼 부와 명성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소설가들을 상대로만 마음껏 비평할 자유가 있다.


  그럼에도 메리케이의 글은 서평가들을 향해 건네는 독려처럼 읽힌다. 불콰한 얼굴로 소주 냄새를 풍기며 대중의 수준을 한탄한 다음 날, 4매짜리 짧은 사건 기사를 쓰면서 리드 문장 하나에 머리 싸매는 선배 기자의 옆 얼굴 같기도 하다. 어쨌든 '잘 써야 한다'는 것. 누군가에겐 이 짧은 기사가 특정 사건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일는지 모르니. 내가 사건을, 책을, 세상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방식은 그렇게 가벼우면서도 때로 측량할 수 없이 무거운 것이다.


어떤 지면에 실린 것이건, 아마 서평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서평에서 다룬 소설 자체를 읽어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평은 소설의 대체물로서, 서평을 읽는 이들에게 서평가의 경험이라는 또 하나의 차원을 더해준다.


끝내 몰라줘도 상관 없다. 남성잡지 GQ의 전 편집장 이충걸의 말을 빌리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이 있으니. 그래서인지 이 냉소적인 할머니의 평생 고집이 담긴 추도사가 따뜻하게 읽힌다. 역시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서평가들이 부끄러운 사태를 면하기 위해 취하는 전략은 다양하다. 그런데 동료들이 큰 자각 없이 사용하는 클리셰를 피하고자 다른 표현들을 선택해 보지만, 이 표현 역시 금세 또 하나의 클리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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