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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01. 2023

지운다고 될 일이 아니지만

23.01.01.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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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첫 번째 단어는 '삿포로'다. 삿포로는 일본에게 있어 불모의 땅이었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개척이 시작될 정도의 변방이었다. 1888년 완공된 홋카이도 도청의 구청사는 그 변방에 대한 지배가 결실을 맺었음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누인이 터전을 잃고, 개척에 동원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홋카이도산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33m 높이의 건물인 이 구청사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형 건물이었다. 디자인을 담당한 히라이 세이지로는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랜셀레어 폴리테크닉 대학교를 졸업한 젊고 야심만만한 건축가였다. 일본풍이 아니라, 당시 서양에 유행하던 네오바로크 양식이 구청사에 적용된 이유다. 설국에 이질적인 붉고 거대한 외관은 이 유행과 야심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출처 : https://www.sapporo.travel/ko/spot/facility/former_hokkaido_government_office/


조선, 대만,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발견되는 일본의 '식민지 건축'의 전조를, 홋카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건축물이 드러내는 야심의 방향은 동일했다. 책이 삿포로의 붉은 벽돌 청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국에 남아 있는 건물들로부터 앞으로 일어날 식민의 전조를 읽어내기를 독자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 독자는 한국인이나 대만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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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기간은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두고 보면 극히 짧다. 이 시기를 다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저자인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단언한다. 지배의 기간은 짧았으나, 전쟁과 식민이 남긴 상흔은 깊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린 사태를 반복할 수는 없다. "지금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묻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그 재발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12)


그렇다면 왜 건축일까? "건축물이 그것이 세워진 시대의 총체를 사실로서 반영하기 때문이다."(13) 수많은 사람들의 의도가 반영된 역사적 사물인 건축은, 시각적인 충격을 관람객에게 전달한다. 건축물에 담긴 의도와 시대적 맥락을,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매체이므로 다룰 가치가 있다. (그래서 그는 무조건적인 철거를 내켜하지 않는다.)


건축물은 구체적인 재료와 그것들을 쌓아 올릴 독특한 공법과 양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의 지리적 조건, 정치적 상황은 재료와 양식의 고유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재료의 유통과 생산에 대한 지배력, 건축가들의 인적 네트워크, 잡지로 유통되는 식민지 각지의 정보는 식민지 건축의 구체적 형상에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그가 재료와 건축가들의 '물류'를 공들여 설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저의 부제는 '제국에 구축된 네트워크'다. 그는 건축물과 재료, 양식, 건축가의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 제국 내에 구축된 네트워크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지배의 의도를 읽어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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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한 기구를 식민지와 지배 영역 곳곳에 설치했다. 정치, 군사, 경제적 차원의 지배를 담당할 기구들의 청사가 대표적이었다. 기구를 세웠다는 건 단순히 문서상으로 존재한다는 게 아니고, 그 지역에 실체를 가진 건물로 존재해야 했다. 기존의 건물을 빌렸든, 아니면 새로 세웠든 그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빌려서 쓴다면 그만큼 지배력이 약했거나 필요성이 없었단 것이고, 반대로 새로 세웠다면 지배가 완결되었거나 그런 상징적 행위가 필요한 상황이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 건축물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잡았는지 그 맥락도 모두 확인할 필요가 있다.


건축이 "위정자의 권력을 과시하고 상징하는 수단"(23)이라면, 왜 바로 총독부를 지배 초기부터 신설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직 지배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배 지역의 세금과 관세 수입이 부족해 일본 정부로부터 식민지 총독부가 '보충금'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있었고, 지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식민지 주민 생활과 직접 관련되어 있거나 지배자가 주민을 지배,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시설"(50)부터 지어야만 했다. 그러니 청사는 지배의 완결을 상징한다. 좁고 낡은 건물로 지배를 유지하기엔 복잡해졌다는 뜻이니까.


차이가 있다면 만철(만주철도)의 사례인데, 이 차이는 만철의 독특한 지배 방식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만철은 철도회사인 동시에, 그 노선을 따라 발달한 부속지에 대한 행정, 경영, 건설, 연구 개발 등 다양한 개발에 참여한 국책 회사였다. 그러니 역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시설들도 함께 건축했다. 부속지에 대한 만철의 지배 능력은 이러한 부속 건물들에 의해 지탱되었다. 게다가 중국 각지엔 열강이 지은 건축물들이 있었고, 이곳에서 세계 건축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만주국 정부 청사는 만주사변으로 인해 만주국 정부가 성립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다른 지배 기구 청사들과 달리 만주국의 정부 청사는 만주풍의 외관을 지녔다. 이는 중국의 건축 양식과 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하려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동시에, 더 이상 일본이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다는 외교적 관계 변화를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괴뢰국이라는 특성상, 내부 단합을 도모해야 할 필요도 컸다. 그리고 그 필요가 모두 사라졌을 때, 만주풍 외관은 지배 기구의 청사들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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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건축물들을 지은 건축가들은 모두 지배 기구에 소속된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와 지배 영역을 서로 오가며 영향을 주고 받았다. 저자의 말마따나 "한 조직에 반드시 여러 지배 지역을 거친 건축가가 있었다."(144) 예컨대 오노기 다카하루는 대만총독부 촉탁에서 시작해 만철 기사로서 만철 본사의 건축계장, 건축과장을 지낸 후 다롄에서 오노기요코이이치다 공동건축사무소를 열었다. 노무라 이치로는 대만총독부 영선과장을 지낸 후 조선총독부 촉탁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은 "바다를 건넌 건축가"(146)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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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건축물의 주요 재료인 벽돌, 시멘트, 철이 어디에서 생산되어 어디에서 주로 쓰였는지를 추적하는 장에 이르면, 제국 내의 물류의 네트워크가 지닌 윤곽이 뚜렷해진다. 벽돌에 대한 광범위한 수요는 벽돌을 일본 식민지와 지배지역의 주요 산업으로 만들었고, 질 좋은 시멘트는 대규모 건축물 신축을 위해 일본 본토에서 제국 각지로 수출되면서 기업들의 성장을 이끌었다. 강철의 경우 1940년대 이전까지는 일본을 제외하고 제대로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철골을 대규모로 사용하는 건물을 지으려면 수입이 필수적이었다.


물류에서의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대만처럼 수요는 높으나 생산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건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만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들은 일본 제국의 단단한 물류 네트워크가 정상적으로 기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식민지 건축물들의 완성은 안전성 높은 물류 네트워크의 완성이 밑바탕에 있다. 이 네트워크는 재료뿐만 아니라 사람, 그리고 정보도 함께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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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이 지배에 왜 필요했는지 구체적으로 논하고, 구체적으로 식민지 건축의 내용과 지배가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식민지 건축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등의 문제를 말할 때 비로소 둘의 관계가 명확해지는 것이다.(213)


이렇게 단단한 네트워크의 형상을 더듬으면서 저자가 최종적으로 정리한 내용은 5장에 요약되어 있다. 유럽 열강은 식민지에 본국의 건축 양식을 적용한 건축물을 지었다. 이것을 '콜로니얼 아키텍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 일본은 전통적 건축 양식보다는 서양의 건축 양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1)메이지 유신 이후 자국에서도 공공 시설을 서양식 건축물로 세우는 경향이 있었으며 2) 고등 건축 교육이 서양 건축 위주였고 3) 지배지에서 서양풍 건축이 '준거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219)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배 능력이 있는지 그 여부가 시험대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 이미 식민지에 자신들의 건축 양식으로 건물을 지어 올린 서구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서양 건축 양식으로 지배에 필요한 건축물을 지어 올려야 했다. 하지만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지 않는 건축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일본이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221)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지어 올린 식민지 건축은, 해방 이후에도 그 건물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이후 피식민국의 피폐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새로운 정권이 이 건물의 사용 권한을 이양받았다는 사실 보여줌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 이를 단순히 과거의 잔재로 이해하고 폐기하기보다, 그 지역의 지울 수 없는 역사를 알려주는 문화 유산으로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건물은 사라져도 식민지 건축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래 남는다. 깊고 오래 남는 상처를 반복해서 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건축물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그 자리에서 계속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저자가 식민지 건축물에 관심을 보여주는 이유다.


식민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책이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어렵지 않은 문체로 쓰여 있어서 단숨에 읽기에도 좋다. 특히나 식민지 건축물들의 이질적인 분위기에 홀려 보았던 사람이라면, 이전과 다르게 건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옮긴이의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어떤 맥락에서 번역했고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알았으면 좋겠는지 궁금했는데. 옮긴이의 말이 없다면, 독자는 너무 많은 노고를 감당해야 한다. 가이드 없는 자유여행이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때로는 역사에 통달한 가이드가 스치듯 지나는 관광객에게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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