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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02. 2023

일기 읽은 일기

230102 서기슬, 연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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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등학교 때 서기슬을 만나서 소설쓰고 시쓰고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훨씬 빨리 정신차리고 본격적인 회사원의 길을 걸었을텐데, 덕분에 딴짓한다고 이것저것 기웃댔다. 지금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하진 않고... 더 격하게 노닥댔을 거다. 훨씬 더 재밌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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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뭔가를 읽고 여기에 그 감상을 적고 있으니 이것도 일기다. 조금 더 세심하게 정의하자면, 읽기 일기다. 읽기이기 때문에 남들도 같이 보라고 올려두는 것이지만, 일기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보면 부끄러워진다. 가능성은 낮지만 언젠가 여기 올린 글들을 엮어 책을 낼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차라리 발가벗고 연트럴 파크를 뛰어다니는 게 덜 부끄럽겠다 생각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물론 나는 그의 오래된 독자였고 나의 일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생각들이 단지 일기의 형태만을 띄고 있음을 알았기에 걱정은 안 했다. (나라면 그렇겐 못했다) 여하간에 무슨 내용이 있을까 궁금하고 두려워 첫 장을 펼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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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며 글 말미에 달린 날짜들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적잖이 위로가 되었다. 나도 내가 남긴 흔적들을 오롯이 나로 받아들이고 너무 미워하지 않을 때, 이렇게 만들수도 있겠다, 그리고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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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강렬했던 감정도, 장면도 점차 흐려진다. 그럴 땐 결국 그 때 남긴 글들만이 나의 감정이 어땠는지를 기억해준다. 일기를 모아 본다는 것은, 나를 만들어 온 순간순간의 감각들을 꺼내어보고, 잊고 있었던 감각의 기원을 되새기는 작업이다. 물론 그것은 진정으로 그때의 감각이라기보다 문자적 재현이지만, 우리는 기억을 되살릴 방법을 그것 밖에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의 일기를 보며 잊고 있었던 나의 일기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문장들에 남긴 감각의 흔적들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의 일기를 보고, 나의 일기들을 되살린다. 일기를 모아서 보여주는 일은, 그러므로 타인의 삶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생동감있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약간의 부끄러움을 재료로 삼아, 주변인의 삶에 색을 되돌리는 마법같은 일이 '일기 읽기'로 인해 일어난다.


이것은 언젠가 다시 나의 일기가 될 것이다. 일기는 전염된다. 기록을 남기는 일이 나를 좀 더 알차게 만들어줄 것이란 기대가 부푼다. 비록 비루한 문장이라도, 나는 사라져 버릴 나의 모든 순간들을 실패하는 방식으로나마 붙잡을 수 있다. 일기 읽기가 가져다 주는 미약한 경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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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구체적인 문장들을 마주하며 또 한 번 웃는다. 그러니까 "성인이 되어, 특히 중년으로 가는 시기에 많은 '어른'들이 겪는 우울이나 위기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에서 온다."같은 것들. 일기에 적힌 경험들엔 보편성이 있다. 개개인에겐 특수한 경험들이지만, 모두가 인생에서 비슷한 날들을 한 번씩은 지나기 마련이다. 일기가 온전히 내밀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암호문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곤할 것이다. 서기슬의 일기장을 읽는 일이 즐거운 건, 일단 얘가 재밌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일기 속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고로 자기 일 아니면 관심이 없다. 아니면 남 못되는 일. 여기 이 일기에 남 못되는 일은 없으니 결국 내 이야기가 있냐 없냐가 중요해지는데, 의 글쓰기는 아주 개별적인 경험이지만 그것을 풀어놓고 나면 결국 나의 이야기이자 너의 이야기인 보편적인 무언가를 품고 있다. 구체적인 문장들을 다 옮기면 책 한 권이 될테니 이런 건 사서 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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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를 쓰는 습관은 언제나 좋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쉼표를 의도적으로 빼려고 노력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잘 안 된다. 나에게 쉼표가 여전히 리듬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한데다가, 쉼표만이 나의 복잡한 문장을 어디서 끊어 이해해야 할 지 정확히 구분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잘게 나누기보다 긴 문장을 쉼표 하나로 묶어 하나로 만드는 편이다. 정확한 의미는 단문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최종적인 결론이다. 그러니 나는 그의 쉼표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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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의 일기장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는 건 꽤 행운이다. 보통 또래의 글들은 알맹이가 없다. 경험이 일천하면 글도 그 수준이다. (이건 내게도 해당된다. 그래서 더 겸손해져야 하지만. 딴데로 잠깐 샜지만) 30대 남자의 글에서 자부와 체념이 없는 문장들을 마주하는 경험은 드물다. 보통은 자기 잘난 맛이 너무 강해서 신맛이 나기 마련인데 담백하다. 글의 중심이 자신과 세계의 어느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만사 자기 위주도 아니고 동시에 세계에 너무 빨리 절망하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살면 될까? 음, 서기슬처럼 살면 된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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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단숨에 읽기 어렵다. 일기라는 형식에 혹해서 펼치면 그 밀도에 질릴 가능성이 높다. 일기를 읽어나가는 좋은 방법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관심이 가는 주제만 읽는다. 나는 서기슬이 나랑 닮은 구석은 별로 없지만, 생각의 발자취가 겹치는 경우들은 꽤 많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후루룩 보다가 지금 나의 고민을 예견한 듯한 부분에 머물러 오래 읽는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오래 묵은 고민을 해소할 단초를 찾기도 한다. 매번 그에게 귀찮게 질문하기 전에 미리 FAQ를 찾아본다는 느낌으로 책을 훑어본다면 꽤 많은 부분에서 책과 대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다.


나는 원래 경험이 이론에 우선하는 형태의 글들을 잘 읽지 못한다. 보통 그런 글들은 경험이 일천해서 이론을 깨기는 커녕 입증해주고 만다. 자기 딴에는 깨달음인데 크게 보면 편견인 글들이 많다. 그런 위험은 자기 경험을 절대화하는 순간 찾아온다. 내가 겪은 게 전부라고 믿으면, 그때부터는 주화입마다. 경험이 주는 강렬함에 중독되어 자기의 특수함을 모르는 것이다.


서기슬의 글은 예나 지금이나 잘 읽히는데, 특히나 나와 사상적으로 완전히 동일하지 않음에도 좋아하는 건, 그가 경험을 언제나 적절한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경험한 바가 있으므로 그것이 맞다고는 생각하지만 다른 경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의 톤이 좀 다르달까. 일기에도 간단히 언급된 부분인데, 서기슬은 내가 원래 이렇게 생각했는데 네 말 들으니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빠른 인정의 속도만큼 사고가 유연하다. 그덕에 글은 막힘이 없다. 주장은 있으되 고집이 없고, 경험이 있으되 절대화는 없다.


단지 겪은 바에 대해 담백히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안다. 자의식 과잉의 시대에 그러기란 드문 일이다. 자본주의자인 서기슬은 그것이 셀링 포인트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지만, 난 그 남김 없는 철저함을 예나 지금이나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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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면 문장의 리듬도 산다. 리듬은 확신의 표현인데, 꾸밀 것이 없어야만 버벅대지 않기 때문이다. 부실한 내용은 장식을 요구하고, 리듬은 그 사이에서 사멸한다. 가벼운 문장들을 구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나의 글이 가라앉는 것은 다소간은 그 때문이다. 여하간에 그렇게 쓰는 사람도 더 잘 쓰고 싶어하는 것이다. 있는 놈들이 더하다. 그래도 더 잘 써서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겁다면, 어서 더 잘 쓰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나쁘진 않지. 다음 서기슬의 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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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 곱씹은 문장. "다가와서 흩어지는 시간에 꼬박꼬박 흔적을 남기는 것은, 당초의 목적이나 이유와 상관없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살아가는 동력이 되는 일임은 분명하다, 과거의 나는 일기장에 이런 얘기를 많이 썼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여전히 세상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너무 많아서, 들뜬 마음으로 일기를 쓰는 미래의 내가 기대된다고 말이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선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할 수 있어야 하고, 무언가 기대한다는 건은 변화가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일기를 많이 쓰면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는데, 늘 똑같은 나날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늘 똑같은 날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204) 새벽에 서기슬은 내게 후기가 기대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 문장 주변을 오래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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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쓴 글은 너는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 즈음에 썼던 글들을 어느 순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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