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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Dec 29. 2022

도끼가 듣고 있어

22.12.29.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액스> 

소설 <액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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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 연일 연쇄살인범과 관련한 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다. 처음엔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했는데, 수사를 할수록 계획의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밝혀진 사건 이외에도 또 다른 희생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어떤 얼굴이었을까, 어떤 얼굴을 하고 여러 사람들을 죽이고 또 그 주변에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죽음보다 못한 상태로 만들어버렸을까. 


잔학한 범죄자를 사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미화하거나 동정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라고 낙인만 찍고 예외 처리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수많은 범죄자 미화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 말에 동의하지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좀 납작하지 않은가 싶다. 신상이 공개된 후 그 범죄자에게 곧 '사이코패스' 검사를 시행할 예정이라는 자막이 흐른다. 문제의 근원을 드러내려 하기보다 맘 편히 격리만 하고 끝내려는 시도가 아니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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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희가 추천해서 읽고 있던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를 마저 읽었다. 설정이 충격적이다. 제지 회사에서 오래 일하던 버크 데보레는 경기 변동으로 인한 대량 실업의 여파로 직장을 잃는다. 금방 일자리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거라 낙관했지만 번번히 합격에 실패하고 생계는 점차 어려워진다. 어떻게 하면 재취업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는 결론을 내린다. '나보다 잘난 애들 제껴버리면 되지.' 그래서 이력서를 받을 가짜 회사를 차려서, 수많은 이력서들 가운데 자기보다 조금 더 나아보이거나 경쟁 상대가 될만한 사람을 추려 그들의 '모가지'(소설 맨 뒤에 실린 박찬욱의 추천사에 실린 표현을 빌면)를 하나씩 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준비를 철저히 하고서도 막상 사람을 죽이니 벌벌 떨고, 마음을 안정시키려 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등 미숙한 살인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이려고 했던 사람과 우연히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이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서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을 본 후에는 그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대성 통곡을 한다. 하지만 한잠 길게 자고 나서 그는 이래서야 효율적인 프로젝트 수행(그는 살인을 프로젝트라고 부른다)에 방해가 되니, 연민의 감정이나 인간적 교류를 철저히 차단한다. 그리고 덩달아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의 마음이 가라앉는 만큼, 나의 등골은 오싹해진다.


"지금 이 사회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 한창때의 사람들, 인생의 절정에 다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폐기 처분시키고 있습니다. 이게 미친 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가 말한다. "동의합니다." 나는 말한다. "틈만 나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 혼자 바둥거린다고 바로잡힐 것도 아니고." 그가 말한다. "우리도 같이 미쳐가야죠, 뭐." 나는 말한다. 그 말에 그가 환히 미소를 짓는다.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p.104)


자신이 왜 남의 '모가지'를 따야하는지 정당화하는 과정은 궤변이다. 1인칭 화자의 시야 한계를 이용해서 독자들이 손쉽게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에, 이 궤변은 좀더 손쉽게 간파 가능하다. 하지만 그가 의외로 똑바로 사리판단하는 게 가능하단 사실은 여러 장면에서 드러난다. 자신을 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동료 노동자가 아니라 전문경영인들과 그들을 자리에 앉힌 대주주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루거를 든 것은 데보레지만, 모가지를 따는 도끼를 크게 휘두른 건 그들이다. 그가 루거를 들고 피해자를 찾아가는 자리마다 도끼로 잘려나간 사람의 잔해가 남아 있다.


멍청해서가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너무 빠르게 체념했다. 세계는 해결 불가능한 영역, 자연과도 같다. 그러니 그것에 도전하기보다 해결 가능한 범위에서 문제를 기획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반복해 효능감을 얻고자 한다. 대량 해고를 막을 수 없다면 경쟁자를 줄이자, 아내의 바람을 막을 수 없다면 바람난 상대방을 지워버리자... 심지어 그런 일을 하는데 별다른 리스크도 없지 않은가? 데보레에겐 리스크 관리가 된다면 살인도 좋은 문제 해결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내를 지키고 가정을 지킬 수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루거를 들고 움직일 것이다.


데보라 버크는 한병철이 이야기하던 '프로젝트'적 주체의 모습을 묘하게 닮았다. 문제가 정확하냐의 여부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 게 중요하지, 실제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치밀하게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철저하게 실행한다. 먼 곳까지 사전 답사를 가고, 다양한 알리바이도 마련한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대화를 능숙하게 하고, 거짓말도 잘 한다. 가족은 끝내 범행을 모르고, 엉뚱한 사람들이 사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파탄에 이른다.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p.162)


그의 살인을 멈출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빠르게 식는 모습을 경험한 후 그는 살인의 부담을 덜었다. 그는 자신이 추적당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사람들에게 이 사건들은 잦은 살인 사건 보도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타인에게 그렇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그는 안도한다. 그는 더 이상 살인에 미숙하지 않다. 사람들 사이에 악의가 없는 경우는 드물기에,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었고 경찰은 엉뚱한 사람들을 지목해 사건을 종결시키는 데 몰두했다. 누구도 자신의 목을 옥죄어오지 않으니, 누군가 대신 목을 옭아매고 죽는다. 똑똑한 데보레에게 메시지는 명확하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깔끔하게 성공하리라.


그는 특이한가? 정상은 아니다. 마음 속에 오늘 상사의 '모가지'를 따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도 계획까지 짜서 실행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그를 소설 속 예외적 인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가 기괴한 선택을 내리는 과정에서 노동자 사이의 연대가 상상적 차원에서부터 부서져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달라는 끊임없는 자기계발의 명령도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강박적으로 찾게끔 만들었다. 말간 얼굴의 살인마를 너무 많이 만났고, 데보레 역시 그런 얼굴이었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밀레니엄은 생산적인 직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버리는, 이 말도 안 되는 경영 방식을 부추기고 있다. 단지 2000년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실직한 이유도 인류가 미쳐가고 있기 때문이다.(p.160) - 이 소설의 출간연도는 1997년이다. 출간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미쳐가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징벌을 받는가? 안타깝지만 원하는 대로는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행운'을 빈다. 그가 자기보다 나은 동료 노동자들을 물색하기 위해 가짜 회사 광고를 돌리러 우체국을 방문했을 때, 우체국 직원은 그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한다.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나서 데보레가 면접을 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찰은 그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한다. 모두가 살인마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아이러니한 세계에서 '업보'의 원환이 명확할 리 없다. 잡히기 전까지 그가 끝내 살인을 멈출 수 없을 것을 안다. 법도 업보도 우리를 이 찜찜함의 지옥에서 구원해주지는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은 범죄 소설인 동시에 지독한 사회파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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