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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29. 2022

우리를 바꾸는 우리

221228

  회사에서 상을 하나 받았다.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올 여름을 통째로 바친 기획이었다. 평일엔 출입처인 국회 취재에 매진하고, 주로 퇴근 이후나 주말 시간을 할애했다. 제대로 쉬지 못해 늘 피곤했다. 그래도 좋았다. 의미있는 취재라고 믿었으니까.


기획기사의 1회차. 2022년 8월19일자 경향신문 1면에 일부 실렸다. 스크랩마스터 갈무리


  다시 하라면 글쎄, 잘 모르겠다. 휴식 없이 일을 하다보니 체력이 떨어졌다. 어느 날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왼쪽 눈꺼풀이 덜덜 떨렸다. 업무의 양은 선배가 더 많았다. 224건의 존재는 2008년에 이미 알려졌지만, 개별 사건이 무슨 내용인지, 당사자가 누구인지는 공개된 적이 없었다. 경기도 일산의 법원도서관에서 판결문을 하나하나 찾아내야 겨우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기록이 불가능해 사건번호를 일일이 외워야 했다. 그 일 대부분을 선배가 했다. 평일엔 내가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인터뷰이와의 만남도 대개 선배 몫이었다. 내 역할은 자료 정리와 분석, 이메일 인터뷰, 기사 작성에 그쳤다. 그것만도 시간이 부족했다.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 바깥의 일이었기에 따로 시간을 빼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출입처 취재가 아닌 일을 하게 해달라 요구했을 때 회사가 받아준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취재에 든 시간을 추가 업무 시간으로 기록할 수가 없었다. 기사 작성에 들어간 시간만 썼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방식인가. 갖춰진 업무 틀 안에서는 많은 배려를 받은 셈이었지만 아쉬웠다. 비단 나 때문만이 아니라, 회사 발전 차원에서 다른 상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소위 '얘기가 되는' 기사거리를 가져오고 취재에 열정 있다면 일상 업무에서 제외해주는 결단도 필요하지 않나. 조직이 그렇게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운영 방식이 달라지지 않고는 늘 쓰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기사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새롭고 심층적인 무언가가 나온다면, 개인이 자기 삶을 갈아넣은 결과. 그런 조직, 정말 건강한가.




  이틀 간 정치학 연구자 조무원의 <우리를 바꾸는 우리>를 읽었다. 정치사상사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내용 자체로 흥미롭지는 않을 것 같다. 사회계약론 이야기다. 홉스 독해가 조금 독특하나, 이 역시 기존 연구에서 찾아볼 수 없지 않다. 그저 반가웠다. 대학 시절 수강한 '근대 서양 정치사상'과 '미국 정치 사상' 수업이 머릿 속에 재생되는 듯했다. 가 생각하는 저자의 핵심 질문은 이러하다.


  "오래된 약속을 갱신하도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으려고 할 때 재건은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 153p


  내용보다는 저자가 거론하는 사례들이 흥미로웠다. 조무원은 사회계약론을 설명하기 위해 '허물'을 비유로 든다. 아이들이 매미 허물 관찰하 정치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허물을 생각한다. 허물을 탈피한 상태를 사회라 한다면, 자연상태는 허물을 벗기 전 인간 세상의 모습이다.

   하나. 조무원은 어릴 적 학교 숙제로 족보 탐색을 받아들고는 '시조'의 정체를 궁금해 했단다. 시조에게도 부모는 있었을 텐데, 왜 하필 특정 인물을 시조라고 적어놓았나. 그가 헌법 제정으로 보통 매듭짓는 국가의 기원을 고민하게 된 배경이다. 글쎄, 그 헌법은 누가 쓴 거냐고...

  아래는 조무원의 세심한 논변을 보여주는 문단이다.


  "'국민'은 오늘날 환영받는 단어가 아니다. 도처에 있다가 사라진 국민이라는 말은 억지로 '우리'를 만들었던 기억들을 환기한다. 국민학교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무시로 국민의례를 하던 세대도 있었다. 그렇다고 국민이라는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그것은 엄연한 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국민이라는 단어 없이는 광범위한 영토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경험을 기술할 수도 없고 정당화하기도 어렵다. / 나는 국민을 호명하는 말들을 헛소리로 흘려듣지 않고 그 말들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긴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 86p


  책을 읽다 보면 조무원이 영화, 문학 등 콘텐츠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란 게 느껴진다. 칼 슈미트를 설명하면서는 <백년동안의 고독>을, 기원 찾기의 어려움을 말할 때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끌어온다. 자연상태를 설명할 땐 <오징어게임> <배틀로얄> <헝거게임> 얘기(다만 자연상태와 달리 이들 게임에는 외부에 조직화된 힘이 존재해 인물들을 게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론적 자연상태와 다르다고)를 꺼낸다. '부동의'가 지닌 정치 규범적 가능성을 타진할 땐 <필경사 바틀비>를 말하고, 여성의 정치적 능력이 제한되는 배경(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설명력을 가진)을 쓸 땐 <서프러제트> 속 주인공들의 상황을 근거로 든다(앨리스에겐 아이가 없는 반면, 모드와 바이올렛은 임신 상태이거나 아이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전공자답게 동양 사례를 거론하는 것도 재미 포인트다. 마키아벨리를 근대 정치의 시초라고 부르는 이유(정치와 도덕의 분리 시도)를 얘기하다가 조선시대 예송논쟁 거론하는 식이다.

  그의 초점이 끝내 현재라는 것이 가장 좋았다. 여러 재밌는 사례 서술에 그치지 않고 그는 오늘날 사회를 이해하고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 논의하는 기초로서 사회계약론이 유용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여성, 이민자, 어린이를 동등한 시민 또는 인민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은 '왜 우리 사회는 이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책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읽은 부분은 아래와 같다.


  "스트라우스는 홉스가 자연을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위치시킨다는 점을 줄곧 비판했지만, 홉스는 (근대적) 인간이 무엇이 옳은지를 둘러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갈등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홉스에게 대안은 옛날의 도덕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세계를 만드는 데 있었다. / 홉스가 믿었고 타인들도 그렇게 믿을 것이라고 봤던 유일한 규범적 근거는 우리가 전쟁상태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 뿐이다. 인간들의 전쟁이 저마다 무엇이 옳은지를 둘러싼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투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거기에서 평화를 위한 사회계약을 시작할 수 있다." - 143p


"약속의 정치는 모든 것을 경합적인 것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약속 위에 협의의 토대를 쌓아나갈 수 있다. 이 규범적 토대는 우리가 곧장 정의의 원칙들을 정립하기에는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아슬아슬하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이다." - 148p


  롤스의 완결된 세계가 다른 도덕적 전제에 얼마나 취약한 폐쇄적 공간인지, 자신의 도덕적 판단과 다른 존재를 죽고 죽이는 문제로 상정하는 슈미트적 정치 인식 앞에서 협상이 때로 얼마나 무력한지 현실 정치를 경험한 이들은 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이 꼴로 살 것인가. 책의 제목 '우리를 바꾸는 우리'는 조무원의 이론적 도달점이자, 정치의 미래를 향해 내미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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