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0
민주주의에서도 힘은 중요하다. 완전한 민주주의라도 '강제의 부재'는 있을 수 없다. 어느 곳에서든 국가나 정부는 구속력 있는 공적 강제를 부과하는 '합법적 폭력'이다. 이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해도 민주주의는 말의 힘과 설득의 방법이 우선인 체제다. 시민의 적극적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합법적 폭력도 국가의 강제력도 물거품이다. 정치 실패 이전에 말의 실패가 선행하는 게 민주주의다. 말이 나쁜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이 설 자리를 잃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다. - 9p
진실보다는 '진실 같은 것', 과학적이고 절대적인 판단보다는 '주관적 공감'과 '동의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수사학에서는 더 중요하다. ... 확실한 과학적 증명을 거쳐야만 행동할 수 있다면 인간 사회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행동한다. 희망의 여지만 있어도 행동에 나서는 게 인간이다. ... 그런 점에서 철학보다 수사학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것은 틀림없다. - 37p
왜 게티스버그에서 연설을 한 것일까? ... 그곳에서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전투가 벌어졌따. 1863년 7월1일부터 3일 동안의 전투에서 북부군은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양쪽 모두 피해가 너무 컸다. 사상자는 전사와 부상, 실종 및 포로 등을 합해 5만1000여명에 달했다. ... 시신의 신원 확인 등 문제로 속도가 나지 않아, 예상과는 달리 그 이듬해 봄까지 매장이 계속됐다. ... 헌정식은 애초 예정일보다 한달 정도 늦춰진 1863년 11월19일에 치러졌다. 107~109p
이를 위해 린든 존슨은 정치적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민주당은 남부의 지지를 잃을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린든 존슨의 대통령직 재임이 어려워질 수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때 이후 남부는 오랜 민주당 지지 지역에서 이탈해 공화당의 지지 기반이 됐다. 텍사스 출신인 린든 존슨도 대통령 재선의 기회를 잃었다.
정치학자들은 정치가들이 재선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만 정책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며, 대의를 위해 정치적 대가를 감수할 때도 있다는 주장을 할 때 린든 존슨의 사례를 들곤 한다. - 153p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앞서 이 연단에 섰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장례 행사의 마지막을 추도 연설로 마무리하도록 관습을 만든 입법자에게 경의를 표하곤 했다. 연설을 통해 전몰자들을 명예롭게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가치있는 일로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첫 단락부터 페리클레스는 자신의 개성적 힘을 드러낸다. 아마도 말의 권위를 스스로 자신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연설을 시작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말하는 사람의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서두다. 그의 개성과 인격성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이 부분이야말로 에토스의 전형적인 특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79p
그리스적인 대조법은 또다른 의미에서 민주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대비되는 반의어 짝이 없는 정치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정치적 이성을 갖추지 못한 정치가들은 이런 대조법을 쓰지 못한다. 이런 대조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방향의 주장과 정책만을 말하는 정치가는 사회와 공동체를 통합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독주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적 경쟁자를 자신과 대조되지 않는, 즉 공존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하면서 자신만을 내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 당시 미국 정치에서 흑인과 남부, 노예제가 그런 이슈였다. 게티즈버그 연설 이전까지는 어떤 정치가도 이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북부와 남부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불사하는 일은 그래서 벌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총칼로 수행된 내전을 말로써 마무리하는 것은 정치가 해야 할 최고의 책임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 131p
사회운동가들은 "나는 뉴올리언스에서 거대한 노예선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 비극을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종차별이 만든 사회문제로 그 성격을 정의한 것이다. ...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분노에 그친 것이 문제였다. 오바마는 "나는 뉴올리언스에서 거대한 가능성을 보았다"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그는 다르게 말했다. 뉴올리언스의 비극을 슬퍼하며 그날 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기도한 미국인들 가운데는 흑인들만 있지 않았다. ... 일본인도 한국인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깊은 연대감이 있었고, 이것이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라고 오바마는 생각했다.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비극은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민주 대 반민주', '개혁 대 기득권', '진보와 보수', '흑인과 백인' 같은 막다른 이분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견과 차이를 더 키우고 확대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 아니라, 이견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기반이 있는지를 발견하려 노력하고 더 넓은 협력의 기초를 모색하는 일을 정치의 역할로 여긴다. - 238~239p
하나 더 지적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가 '부분 부정'과 '형용모순'을 잘 사용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절대적 부정의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다. 우리 정치인들은 '결코' '절대' '당장' 등 센 부사를 습관처럼 동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태도는 자신이 옳기 위한 것일 뿐 문제를 진짜로 다루면서 실체적 변화를 이끄는 노력을 경시하게 만든다. 오바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전쟁, 경솔한 전쟁, 무책임한 전쟁이다" 같은 식이다.
... 완전한 칭찬, 완전한 반대, 완전한 대안은 정치에서 불가능하다. 모두를 위한 정책은 존재하기 어렵다. 떄로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해야할 떄도 있고, 예기치 않은 갈등을 감수해야할 때도 있다. 변화는 전체와 연결된 '부분'에서 발생하며, 그렇기에 정치란 전체 정책을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부분 부정과 형용모순의 언어가 필요한 것은 그때문이다. - 245~246p
이전까지 'people'의 우리말은 인민이었는데, 그러다가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진영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인민은 사회주의 진영 혹은 북한식 용어가 되었고, 그 대신 국민이 자유주의 진영의 용어인 듯 강요되었다. 제헌헌법 제정 시기의 논란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 1948년 6월30일 헌법 초안에 대한 조봉암 의원의 반대토론이 대표적 예이다.
[특징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 인민을 일률적으로 '국민'이라는 어구로 표시된 점입니다. ...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 하여 세계 공통의 '인민'이라는 말을 기피했읍니다.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 헌법에서는 모두 인민이라 합니다. 미국에서도 '피-플'이라 표시했고 '냇슌'이라고 아니하며, 불국에서도 '피-피'라 하며 쏘련에서도 '나르드'라 해서 모두 인민으로 되여 있읍니다. 최근에 공산당 측에서 인민이란 문구를 잘 쓴다고 해서 일부러 인민이란 정당히 써야 될 문구를 쓰기를 기피하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입니다.]
이때 제헌헌법을 기초한 전문위원 가운데 유진오는 나중에 회고록을 통해, '국민' 일색의 헌법이 된 것을 아쉬워하며 "'국민'은 ...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궐니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 70~71p
처칠은 미리 작성되고 준비되지 않은 연설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이유는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이었다. 연설문은 미리 썼고, 완벽하게 암기했다. ... 연설을 하기 위해 의회 중심에 설 때 그는 늘 지금이 '운명의 시간'이고 '최후의 심판일'이라고 생각했다. 177p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는지는 몰라도 정치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 종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은 패배했다. 그 때문에 (처칠은) 총리 자격을 잃고 포츠담회담 도중에 귀국해야 했다. - 180p
불어로 저항을 의미하는 레지스탕스는 드골의 연설에서 유래했다. 193p
당시 언론의 80퍼센트 이상이 루스벨트의 정책에 반대했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일주일에 두번씩 기자들의 질문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미리 질문지를 제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하겠다고도 말했다. 그는 "매번 안타를 치려고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높은 타율"이면 된다고 본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집권 기간을 통틀어 루스벨트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기자들 앞에 섰다. 그래서 여론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신문마다 자신에 대한 기사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저녁 시간에는 노변정담 형식의 라디오 방송을 했다. 첫 방송은 '은행권의 위기'에 대한 설명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전개 과정"에 대한 방송 때는 청취자들에게 미리 지도를 준비해 자기 이야기를 따라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문에 미국 전역에서 1년에 판매될 지도보다 더 많은 양이 단 며칠 만에 동이 나기도 했다. - 202~2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