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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19. 2023

'당연한' 체제는 없다

23.01.19. 데이비드 하비,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20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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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책 읽는 속도가 좀 났다. 파울로 제르바우도의 <거대한 반격>을 끝까지 다 읽었다. 메모들로 글 하나 더 쓰려다가 이미 책에 대한 대강의 내용은 앞서의 글들로 정리를 한 것 같아 굳이 반복할 이유는 없을 듯 했다. 마지막 장은 이른바 전망, 앞으로 좌파가 신국가주의라는 새로운 메타 이데올로기 지평에서 국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연합하고, 획득한 이후에 어떻게 그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이 부분은 짧은 글로 정리할 때 그 소감도 같이 정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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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PD저널용 글도 대강 정리를 마무리했다. 이시이 고타의 <가족의 무게>에 대한 글을 살짝 다듬을 생각인데, 때마침 그 사건의 판결이 오늘 내려졌다. 살인죄로 기소된 어머니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되었다. 죄의 무거움에 비해 낮은 양형이었다. 법원의 선고 이유는 여러번 곱씹을만 하지만, 나는 법원의 선처가 '미담'이 되는 사회보다, 그 법원의 문턱을 넘는 사건이 드문 사회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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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앞 부분을 읽었다. 이 책은 세계적 석학이자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그가, 2018년 11월부터 2주에 한 번씩 진행한 팟캐스트 <반자본주의자 연대기>(책의 원제이기도 하다)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는 자기 이론이 '대중'의 지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사람들이 손쉽게 이해하고 언급할 수 없다면, 무슨 힘이 있을까? 나는 하비의 끊임없는 '접점' 만들기가 여러 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의 시위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묘사하며 책을 시작한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대중에게 보장하고자 했던 약속 (경제적 번영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수정할 정치 시스템에 대중이 참여할 수 있다는 약속 (정치적 참여의 약속)이 깨지고, 오히려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초에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호소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이 불평등을 현상유지하는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개조하려는 데까지 시위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하비가 보기에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다. 사람들은 점차 체제 자체가 문제임을 자각하고 있다. 근본이고 급진적인 정치, 경제의 변환의 필요성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시위는 도처에서 끊이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증가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변화는 그간 사람들이 믿고 따르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약속 (더 많은 개방이, 더 많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 파탄났음을 방증한다. 이 부분은 <거대한 반격>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외향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포퓰리즘과 신국가주의라는 내향정치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반동은 2008년의 경제위기, 2020년의 코로나 팬데믹, 그리고 계속되는 기후변화로 인해 결정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


자본의 이동에 마찰을 가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국가 권력을 작동시키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것은 시장으로부터 국가가 철수하는 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시장논리를 기입하도록 국가가 강제하는 현상이다. 국가는 이 논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할 만큼 강제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는 국가라는 것이 없다는 환상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환상과 달리, 신자유주의는 국가라는 장치를 특정한 방향으로 굴절시키는 프로젝트다.


수익성 좋은 투자 기회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초국적 자본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국가들이 가지는 주권이란 장벽을 붕괴시키고, 끊임없이 더 싸고 부리기 편한 노동력을 찾아 이동했다. 그 이동은 무한한 성장이나, 낙수효과와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문제는 이 착취의 남은 공간이 별로 없어보인다는 거고, 그 착취의 과정에서 환경 파괴나 사회적 불평등은 해결의 유인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자본의 순환을 일거에 중지시킬 수 있을까? 자본은 너무 크다. 일상의 너무 많은 부분에 침투해 있어서 그저 붕괴시킬 수만은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자본의 흐름이 장기간 막혀버리면, 경제적인 영향과 사회적 여파가 너무나 크다. 그 경우 생존이 불가능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비는 혁명적인 전복이 일거에 가능한 시대가 아니며, 혁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기나긴 여정이므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계획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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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간략한 역사가 이어진다. 신자유주의란 소수 엘리트층에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계급 프로젝트라 규정한 하비는,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확산이 부의 극단적 불평등을 야기했으며,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 데에는 탄탄한 대중의 지지 기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1970년대 이후 우파는 대중이 신자유의에 동의하도록 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장치를 국가와 시민사회에 기입하고자 노력했다. 우파 경제학자들은 신자유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려 시도했고, 공급중시 경제학의 가장 큰 걸림돌(유연한 노동공급)인 노조에 대한 공격을 전방위적으로 가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기업 엘리트층의 우파 정치인에 대한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기업이 소유한 언론과 기업 기부금으로 유지되는 대학은 반노조, 친기업, 자유시장, 개방 등에 대한 옹호를 담은 출판물과 기사를 쏟아냈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인하여 1) 노조는 힘을 상실했고, 2) 환경과 금융에 대한 규제는 축소되었다. (모두 자본 이동에 방해가 되는 지역적local 권력의 해체를 의미한다.) 국가가 다국적 자본의 파괴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정책적 수단은 상실되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적'으로 달성되지 않을 경우, 과감한 정부 전복이 시도되기도 했다. (피노체트의 사례처럼) 민주주의 절차를 통한 동의는 참여하는 주체를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주조하는 과정을 통해 점차 수월해졌다. 자기계발의 논리는 그 일부분이다. 자기 계발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는 거. 모든 문제는 자기의 탓으로 돌리게 된. 물론 그 밑바탕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열망도 함께 포함이 되어 있었겠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는 시스템의 '실패'를 일깨워 준 사건이다. 잘못은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금융 엘리트들이 저질렀는데, 그들을 구제하는 데 쓴 돈은 일반 인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와 정치가 경제 시스템의 실패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그 도덕적 정당성은 상실했지만, 시스템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도덕적 정당성의 상실은 대중의 지지기반 상실을 이끌 가능성이 높다. (아닌 경우도 분명히 있다.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정부도 과반의 지지를 통해 계속해서 권력을 획득한 채로 존속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정당성을 요청하는 움직임이 '포퓰리즘'과 '신국가주의'라는 양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새로운 정당성을 요청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주체일 수 있는가? 또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정당성을 획득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애초에 그 장치에 포섭되지 않았던/장치가 완전하게 포섭하지 못했던 부분만이 변화를 요구하는 주체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실패, 또는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주체를 생산하는 장치들을 새로이 국가와 사회에 기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지 않나? 그 장치라는 게 뭔가 그렇다면? 3장을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하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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