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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an 21. 2023

어쨌든 필사적으로 붙잡을 것

23.01.20. 북미의 새(2018) + 새를 사랑한 화가(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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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벗어나려는 차량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던 연휴 전날, 퇴근하자마자 아내와 용산으로 향했다. 영화 <새를 사랑한 화가>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커다란 멀티플렉스 안을 한참 헤메다 마침내 상영관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저마다 속닥대는 사람들의 숲을 헤치고 자리에 앉으니 광고도 없이 영화가 시작됐다.


<새를 사랑한 화가>의 원제는 <북미의 새>다. 북미의 새는 조류학자 존 제임스 오듀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완성하는 데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이 책엔 당시 북미 지역에 서식하던 새 497종의 그림이 네 권에 나뉘어 담겨 있다. 그림들의 크기도 매우 커서 책의 높이가 무려 1m에 육박한다. 대략 120세트 정도만 남아있는데, 그 중 하나는 120억 원 정도에 판매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매긴 책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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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계'의 인물이었다. 영어와 불어가 절반씩 섞인 이름부터 그렇다. 그의 원래 이름은 장 자크 푸제르 오듀본으로, 1785년 프랑스의 식민지 산토 도밍고의 도시 레카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농장의 하녀였다. 태어난 곳도, 그의 핏줄도 어느 한 쪽으로 온전히 속하지는 않았다. 1803년 성인이 되자 그는 징집을 피해 프랑스를 떠나며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꾼다. 나폴레옹이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양도하던 해다. 그는 농장 운영이나 사업에 관심이 없었기에 생계는 아내가 책임졌다. 대신 그는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바탕으로 좋아하던 새를 관찰하는 데 몰두했다. 그가 북미 전역의 새를 쫓기 위해 루이지애나의 경계인 미시시피강에 첫 발을 내디딘 건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북미의 새>는 이전에 출간된 도감들에 비해 생동감이 넘친다. 주인공인 새 뿐만 아니라 새가 서식하는 자연 환경, 그리고 그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물들의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다. 그래서 생태학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도 없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냥을 했다. 그리고 철사로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도록 고정시켰다. 박제에도 능해서, 오랜 시간 변형을 방지할 수 있었기에 자세히 그릴 수 있었다. 19세기에 새를 '사랑'했다는 말에는 이러한 한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과거에서 오늘로 불러온다면, 이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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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프랑스령 루이지애나가 미국의 영토가 되면서, 미국의 서부 개척을 가로막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가 사라졌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서쪽으로 향한 사람들은 곧바로 '위협'에 직면했다. 빈 땅이라 여긴 곳엔 뿌리 박고 살던 원주민이 있었고, 야생의 자연은 빈번히 개척자들의 삶을 혼돈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들은 공존 대신 관리를 택했다. 물러나지 않는 원주민은 죽거나 보호구역으로 몰았고, 자연 조사와 개간, 사냥을 통해 주변 환경을 서서히 통제해 갔다. 끊임없이 관리의 경계를 바깥으로 밀어붙이는 '프런티어 정신'은 미국의 정체성이었다.


이 정체성의 한 가운데에 오듀본이 있다. 그는 북미에 서식하는 모든 새들을 망라하는 도감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것이 그가 새에 대해 보여주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많은 것이 미지의 상태로 남겨져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루이지애나의 경계선인 미시시피강은 새롭게 열린 공간의 입구와도 같았다. 왕성한 시선으로 그는 몇 년에 걸쳐 강을 훑어 내려간다. 3,700km가 넘는 길이의 강가에서 포착한 새들을 남김없이 그려낸 그는 마침내 하구에 도착한다. 그곳엔 수백만 마리의 새들로 가득했다. 카메라는 그의 동선을 뒤따르며 그가 그린 그림들을 하나씩 관객들에게 비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은 프런티어 정신의 아름다운 완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 지점에 등장한 육중한 공장 시설들은 이미 그 완성의 균열을 예비한다. 그가 보았던 미시시피 강의 풍경은 이미 사라졌다. 19세기 초 미국에 산업화의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오듀본이 기록한 풍경과 새들은 그 자취를 감췄다. 그가 그린 그림들에 대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새가 아니라 쫓겨난 원주민들의 후손들이 전하는 목소리 뿐이다. 수백만 마리의 새들로 가득하던 뉴올리언스는 이제 가스와 원유를 추출하는 공장들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만 가득하다. 한 때 새와 사람이 뒤섞여 있던 초원은 바닷물에 잠식되어 흔적조차 없다. 살아남은 이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이 그곳에 남아 있다. 오늘날의 살풍경 앞에서 오듀본은 둘로 갈라진다. 프런티어의 성공적인 상징이자 환경운동의 선구자이지만, 그가 상징하는 프런티어는 원주민과 새의 절멸을 예비한다.


새의 서식지를 파괴한 거대 원유 기업들은 계획된 격리시설인 두 곳의 건설을 지원했다. 동물원에 사는 앵무새는 날개가 잘린 채 정기적으로 쇼에 동원되고, 수족관에 담긴 물고기들은 허리케인의 습격에 떼죽음을 당하는 취약한 생존 환경에 노출된다. 오듀본의 이름이 붙은 뉴올리언스의 동물원과 수족관은 그의 이름을 명예와 조롱 사이에 위치시킨다. 비록 내레이터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비판하며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음을 강변하지만, 통제된 채로나마 부여 받은 생존의 공간을 수식하는 그의 이름 앞에서 관객은 순간적으로 혼란스럽다. 그 혼란이 풀리려면, 다음 장면이 필요하다. 영화 속 내레이터는 맨하튼의 풍경이 흐르는 동안 미국의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하나 하나 호명한다. 초혼의 의식과도 같은 장면은 영화가 오듀본을 경유해 구하려는 바를 명확하게 만든다: 필사적으로 기록할 것.


사라진 새들을 기억할 수 있는 수단이 그의 그림이듯, 영화는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는 수단이 되고자 한다. 오듀본의 시대는 새들의 절멸을 예비했고, 오듀본은 기억의 수단을 남겼다. 우리의 시대는 인간의 절멸을 예비한다. 우리는 이 우울한 전망을 중지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 우리는 조금 늦게 태어난 덕분에 그를 참조할 수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그를 구해낼 수 있다. 영화는 그 행동을 촉구하는 기억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고자 필사적으로 미시시피 강변의 오늘을 스케치한다. 그 덕에 우리는 아직, 고독한 영혼으로 죽지 않을 기회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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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과 그림에 매혹되는 와중에도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 아쉬웠다. 불어는 잘 몰라서 그런가보다 했지만, 영어 인터뷰들은 중요 단어들이 제대로 뜻이 살지 않은 경우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쉬운  더 잘 눈에 띈다.


시사회가 끝나고 나오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다들 서로 아는 분위기여서 적잖이 놀랐다. 이 영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온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영화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찾아본 후에야 이미 꽤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만한 작품이었음을 알았다. 어떻게 알고 보러 오느냐고 묻는 내가 바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몰라?) 일단 부끄러운 기록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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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뉴올리언스의 모습을 보고 <재난 그 이후>가 떠올랐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고립된 메모리얼 병원에서 벌어진 안락사 사건인데, 이 사건은 시스템 붕괴된 이후의 사회에서 삶과 죽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회에 불러 일으켰다. 영화에서 마주친 뉴올리언스의 풍경은 우리 사회가 거대한 메모리얼 병원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두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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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썼다가 내린 글은 아내가 꽤 실망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조잘거리던 내용들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사실 나는 종종, 아니 자주 내가 한 말을 까먹는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궁금했든 무차별하게. 어떻게 그것들이 궁금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는 말에, 부끄러워 잠들기를 포기하고 다시 썼지만 사실 여전히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새벽이다. 기억 못하고 다시 써 봤자 실망은 실망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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