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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밥쉐프 Nov 07. 2024

대도시의 데이트 법

도서관이 함께하는 문학 코스

극 내성적인 성격에 집돌이인 남편과 달리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남편 때문에 여행도 못 간다고 투덜거리는 대신 혼자라도 즐기는 삶을 선택했다. 게다가 남편 여행 몫의 기회비용으로, 한 번 갈 여행을 두 번 갈 수 있는 장점까지 있더라. 아이의 방학에는 조금 긴 여행을, 평소에는 도심 데이트를 즐기는 편. 혼자의 여행에 예쁜 딸램이 데이트 메이트가 되어주어 얼마나 좋은지.


1년 중 언제든 좋지만, 특히 여름 배롱나무꽃이 필 무렵의 고운 한옥 도서관이 함께하는 문학 코스를 소개하고 싶다. 자차도 가능한 코스지만, 대중교통 이용을 추천. 무턱대고 주차했다간 엉덩이부터 나와야 할 수도 있는 공간들이라서.






이 코스는 ‘윤동주 문학관 - 청운 문학 도서관 - 청운 공원 - 인왕산 둘레길 - 초소 책방 - 수성동 계곡’으로 이어진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서 1020 버스를 타고 ‘윤동주 문학관’에서 하차합니다. 길을 건너면 바로 윤동주 문학관이 보입니다!”


오늘의 첫 번째 코스 윤동주 문학관. 내가 문학에 문외한이고, 아이가 윤동주 작가를 모를지라도. 그냥 문학관의 분위기를 느끼며 스윽 둘러본다. 친절하게도 돈도 안 받는다.

하지만 꼭 제2전시실 열린 우물을 지나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을 들려보자. 울림이 있는 닫힌 공간, 아주 작은 창으로 조금 새어 나오는 빛을 맞으며 윤동주 시인의 일생과 시를 음미해 본다. 이곳이 사용하지 않는 수도가압장이었기에 전시장이 우물이라는 점도, 윤동주 시인이 일제 강점기에 힘겹게 글을 써 온 사실도 몰라도 괜찮다. 아니 차라리 모르고 모든 상상을 펼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열린 우물을 지날 때 그의 시에 쓰인 자연과 바람을 느끼고, 닫힌 우물에서 귀로 그의 시를 느껴본다. 아이에게 윤동주 시인을 알려주려, 서시를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윤동주 시인도 그러라고 쓴 시는 아닐 테니.



진경산수화 길을 조금 거니는 척하다가 호랑이 동상을 만나면, 왼편 산자락 아래에는 청운 문학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한옥 도서관에서는 뭘 해도 운치 있는 느낌이다. 아닌가 착각일 수도. 운치든 착각이든 뭐면 어때? 계속해서 피고 지는 배롱나무꽃이 누정과 어우러져 여름이 정말 멋진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SNS 사진 한 장을 위해 정자 속 폭포 앞 창가에 줄지어 서 있을 테지만. 무심한 듯 한옥 안, 열람실로 쏙 들어간다. 분명 도서관인데, 열람실 안에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다들 사진 찍으러 온 모양이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더욱 특별해진 느껴진다. 특히나 일반 열람실에 아이 책과 어른 책이 함께 있어 엄마도 아이도 각자 그리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기 딱이다. 여름엔 에어컨 아래가 최고기도 하고.



아이가 엉덩이를 들썩이고 주리를 틀 때쯤, 반대쪽 입구 쪽 도서관 주차장을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청운 공원이 나온다. 나무와 밧줄로 이루어진 놀이터는 세련되지 않아 더 멋지다. 여름엔 바닥 분수까지 나오니, 아이의 여벌 옷도 챙기는 편이 좋다. 가빠지는 언덕 위 청운동 꼭대기쯤 위치한 놀이터다 보니, 아이들이 많지 않아 놀기 더 좋다. 엄마는 사계절 색을 바꾸는 인왕산을 한 번 둘러볼 때, 이미 아이는 놀이기구 위를 바쁘게 오르내리고 있다.



청운 공원은 인왕산 둘레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데. 호랑이가 나올 것 같은 인왕산 깊은 숲 속 이미지와 달리 둘레길이 잘 만들어져 가벼운 트레킹 하듯 산을 오른다. 가을, 겨울에는 떨어진 낙엽이며 열매껍질을 관찰할 수 있고, 봄, 여름에는 오래된 수목이 만든 잎사귀 틈새 햇살 모자이크를 바라보며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너무 힘들지 않게 잠깐, 자연만 느낄 정도의 둘레길이라 더 좋다. 아이랑 함께 가며 전문 산악인 코스 온 건 아니잖아? (나는 혼자서도 전문 산악인 코스는커녕 일반 코스도 꺼리는 사람인지라)



아이는 마치 뛰면 뛸수록 충전되는 배터리는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엄마를 원의 한가운데에 두고 컴퍼스마냥 뱅뱅 돌고도 모자라 에너지가 남아돈다. 그 체력이 버거운 엄마가 앉을 곳을 찾기 시작할 즈음,  기적처럼 초소 책방이 나타난다. 옛 경찰 초소였던 건물을 책방으로 만들어 두었는데 책 한 권을 구입 하고는 단돈 천 원을 얹으면 온몸이 시원해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도 함께 온다. 허기진 아이에게 빵 하나를 쥐어주고, 커피 한잔으로 숨 돌리는 오후의 간식 시간, 초소 책방을 잊지 말자.



혹시나 여력이 있다면 정선 작가의 그림에도 등장했던 수성동 계곡을 찾아 시원하게 발도 담가본다. 정선 작가의 그림에 등장했던 기린교도 찾아보고. 하지만 이만큼 걸었음 되었다 싶으면 계곡까지 안 가도 되지 않나? 이미 주말 오후는 윤동주 님의 시와 책과 놀이터의 땀으로 꽉 채워진 후니까.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부암동으로 내려가, 여러 맛집을 체험할까요? 서촌으로 내려가 통인 시장 엽전 도시락을 사 먹어 볼까요?”

데이트에서 식사를 빼놓을 순 없는 일이니까. 데이트답게 상대에게 메뉴를 물어봐도 좋다. 예쁜 나의 데이트 상대는 가끔은 부암동에서 피자를 외치기도 하고, 가끔은 엽전 도시락의 골라 먹는 재미를 선택하곤 한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오늘 데이트 코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다음에 갈 맛집을 미리 선택하기도 한다. 어쩌다 시장에서 쓸데없지만 즐거웠던 쇼핑을 해서 양손이 무거우면, 지하철역으로 남편을 부른다. 집에 있어서 내심 행복했던 남편은 풀 충전되어 기쁘게 지하철역 마중을 나온다. 어쩌면 내심 떨어져 있던 시간 자체가 행복했을 수도 있다. 내가 즐거워 나갔던 짧은 여행이니, 함께 안 간 남편에게 투덜거리는 일은 없다. 아이도 즐거웠는걸? 다만 이 한마디를 던진다. “내일은 늦잠 잘래. 일요일의 육아는 당신 몫이야.” 집돌이 남편이 일요일은 또 자기 스타일대로 육아를 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아이와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배드민턴도 치고.






누구도 나를 보고 억지로 집에 있으라고도 하지 않았고, 강제로 나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또 내가 남편의 성향까지 거스르며 억지로 내 스케줄에 맞추려고 애쓰지 않는다. 각자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하자고. 어차피 매일매일 셋이 함께 있는데, 주말 하루씩 전담하면 어때서? 꼭 모두의 참여를 강요하는 건, 가기 싫은 회식 억지로 끌려가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자연의 고요함은 특별할 것 없었지만,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순간은 내게 소중한 여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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