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급적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몇 해 전에 쓴 메모를 보고 놀랐다.
최근에야 깨달았다고 느낀 생각, 이를테면 삶과 사람에 대한 통찰이나 원리 깨달음이 그때의 내게서도 너무나 적확한 표현과 언어로 관찰되고 있었다.
애송이라 생각했던 그 어느 날의 나도
지금의 내가 깔볼 만한 바보가 아닌데
하물며 나는 과거의 나에게 하듯
모든 타인들을 쉽게 바보로 만들곤 했다.
근래 큰 일을 겪고 난 뒤에야
나는 입을 다물 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밑바닥부터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릴 때 가장 도움이 된 이들은 과묵한 이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건네준
조언이나 위로의 모양을 한 말들은 명확하고 분명했지만 섣불렀다.
독초가 되곤 했다.
그런 파도들 가운데 과묵한 이들은
적당량보다 훨씬 적은 양의 말만 떼어 주었다.
누군가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이 반드시 그를 위한 일은 아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이미 드러난 일을 두고 말을 얹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다.
그렇게 잘못되기까지 뭘 했냐고 캐묻는 것도 쉽다.
잘못된 시간을 보내는 그도 실은
나만큼의 사리분별력 지혜 명철 신중함
을 가지고 있었다는 진실,
을 마주하는 것보단 훨씬 쉽다.
그 사실을 나는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 몰랐다.
나는 그래서 말을 잃기를 택한다.
쉽게 살던 날들로 돌아가 말을 주워담을 수 없으니
<한 말씀만 하소서>
한 명의 신자, 인 인간으로서 박완서 작가의 애통한 절규는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아둔한 귀를 가진 나에게 너무나 필요해 보이는
직통계시라는 손쉬운 방법을 좀처럼 쓰지 않는 나의 신과
그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그대로 읽을 줄 모르는 나.
누군가가 심오하게 정립해놓은 관념 세계관 이론으로신학을 배울 줄은 알았지만 아 나의 하나님은 그곳에 없었다.
가끔 주어지는 마법같은 평안함과 만족감은 분명했지만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서 돌아보면 그것이 허상은 아니었는지 언제나 되묻게 되곤 했다.
응답 없음에 취약한 나는 그를 붙들어보다가
게으르고 오래 참지 못하는 성정 탓에
이내 불신과 체념으로 치닫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남들을 향해 지각없이 뱉어왔던 말들이
할 말 없는 처지가 된 지금의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탈 없는 날들을 보낼 땐 까맣게 잊고 살았던 나의 몰지각함이
의식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성성하게 살아 돌아오는 끔찍한 기적을 매일 체감하는 지금
뒤늦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말을 잃은 사람이 되어 사는 요즘에야
아 아
그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당신의 음성을 세미하다 하는 건가
문득 생각해본다.
여전히 내겐 너무 이해하기 힘든 당신을 불신 무시 괄시하며
보이지 않는 당신을 믿고 사랑한다 고백했던 날들이 민망할 때면 등을 돌리기로 작정했지만
주여 당신이
말마따나.. 다정한 신이라면
고통 가운데의 나에게
내가 남에게 그랬듯
손쉬운 조언 충고 진단 대신
함께 끌어 안고 살아내 주셨나요.
그렇담
마음도 날씨도 흐린 날
풀어헤쳐진 운동화 끈을 보고도 못 본 척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을 때 학생 운동화 끈 풀렸다며 자기의 한쪽 어깨가 젖도록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 씌워주던 그 중년 행인을 통해
아마 내게 왔겠군요
죽여 달라 호소했던 엘리야의 머리맡에 다만 물과 떡을 놓아주신 것처럼.
당신의 세미한 음성
너무 세미해서
믿을 수가 없는
그 한 줄기가 정말 당신이라면
그걸 믿는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요
이런 질문밖에 할 수 없는
깜깜한 처지 가운데
언제까지 놓아 두실 것인지
이것이 그 유명한 종교개혁자들이
발굴했다는 예정론인지
불신 회의 반항 마저도
당신의 그릇 안에 담겨 있다는 증거요,
신성모독도 그 당신의 예정을 거스를 수 없다면
아 당신은 정말 무서운 신
나를 골려먹는 신
무시무시한 분.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
거듭 거듭 묻게 하는
아직은.. 나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