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언어, 는 나의 자아의 탄생과 해체와 평행하게 탄생하고 나름대로 진화 발달하다 소멸한다. 나의 삶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일들에 관하여 나의 내면은 끊임없이 외재화와 해석을 시도한다. 거리를 두고 재해석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단선적이며 완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그때마다 해체되고 갱신된다.
그 과정은 중언부언이고 자가당착적이다. 과거에 내린 결론을 현재의 내가 조소하고 폐기하기도 하며 더 '나은' 버전의 해석을 내 나름대로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시에 의심하며 그러한 해석조차 잠정적임을 안다. 무엇보다 이제는 언어의 한계를 안다. 나는 실재론자가 될 수 없다.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있는 어법과 글쓰기를 구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중심 생각을 하나의 정돈된, 문법에 성실한, 하나의 메인 센텐스로 정리한 후 나머지의 문장들로 그것을 보조하거나 수사하도록 즉 '복무하게끔'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런 단락들을 엮어서 하나의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
김혜순 시인은 교과서적인 시의 문법으로서 비유(은유)를 회의한다.
"저는 남성적 재현 체계에 대응하는 시 쓰기의 모습을 ‘시하다’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시하다’에 이어서 ‘새하다’ ‘짐승하다’ ‘죽음하다’까지 ‘하다’를 부여봤는데 그것은 저에 의해 서술되는 화자에게 목적어 없이 그/그것 자체의 언어와 행동을 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저는 이것이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는 엄마와의 생성 같은 ‘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시 안에서 타자와의 용해, 자/타의 구분이 사라진 고정 주체를 흐릿하게 하기 같은 것이 이 ‘시하기’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미지의 연쇄와 끝없는 시간, 공간적인 인접성의 환기, 그로 인한 현실의 변형과 굴절, 그것들을 굴러가게 하는 리듬이 ‘나’의 결핍 그 자체를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은유는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바탕으로 갖고 있기에 그런 것을 갖춘 ‘그’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선 사물/여자는 몸서리를 치게 되지요. 간혹 시를 읽다가 그런 시인의 은유를 만나면 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의, 대상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의미’를 준 생산자의 얼굴을 마주한 듯한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김혜순의 말>, p.130~1)
삶에서 일어난 사건, 과거에 대한 해석은 정신이 기능하는 한 끊임없이 업데이트 된다. 그것을 실패 라거나 시행착오 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 반대편으로서 성공 혹은 완결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삶에선 무시로 이미 죽거나 폐기된 줄 알았던 버전의 해석을 다시 불러들이고 또다시 폐기하는 일이 발생한다.
중언부언 하는, 자가당착적인, 결론이 없는, 그래서 기존의 문법에 익숙한 이들에게 낯섦과 두려움,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일으키는, 통약 불가능한, 쉽게 폄훼되는, 원형이 부재한, 계보(또는 족보)가 없는. '하다'로 명명할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계속하여 글(과 쓰기)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