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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an 28. 2023

나를 뛰어넘는 캐릭터 만들기

없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망망대해 속에서...

그동안 나는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업보다도 그동안 겪어왔던 일들을 정연하게 불러내어 아로새기는 일들을 많이 해왔다. 내 얘기를 많이 끄집어내서 했다는 이야기다. 지금 하고 있는 일, 혹은 과거에 해봤던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고, 제일 많이 욕하고, 제일 많이 재밌어하는 결혼 이야기까지... (이혼 이야기라고는 쓰지 않겠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수가 팍 줄어들테니... ^^) 

드라마 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과정을 한땀한땀 기록하기로 결심한 것도 분명히 나와 같이 있던 이야기를 꿰다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단계에서 식은땀 흘릴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다. 식은땀 흘릴 거면 함께 흘리고 같이 어깨동무하며 해결 방법을 구해보자는 생각에서 말이다. 


내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드라마는 이미 제작사에서 감독과 작가를 정해놓고 함께 이야기를 기획해서 만드는 형태다. 다음 포스팅에서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써볼 테지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다른 자리에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제작사의 대표님을 만났고 이미 3년 정도 호흡을 맞춰 본 상황이었다. 그동안 영화 시나리오 각색과 기획을 한 편씩 했고, 제작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는 계약을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엄청난 배움의 시간이었고, 뭔가 작품 하나를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정신승리'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드라마 소재의 기획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님은 나의 결혼 이야기를 여러가지 형태로 변주하면서 아이디어를 내주셨다. 예를 들어서 세 여자가 만나서 하는 결혼과 이혼 비혼 이야기라든지, 이혼 변호사 스토리로 진행을 한다든지... (그런데, 드라마 우영우 이후 변호사 이야기가 너무 많이 쏟아져나와서 없던 것으로... 해마다 어떤 드라마가 라인업되는지 지금 제작들어간 것이 무엇인지 재빠르게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영화 드라마 트렌드 잡아서 분석만 하는 스타트업이 있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드라마 초짜 작가인 나에게 정말 행운이었던 것은 제작사에서 컨택해서 계약한 감독님이랑 호흡이 잘 맞았다는 것. 둘 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서(좋다는 뜻이 아니라 말도 빠르고, 생각도 빠르고, 그래서 이해도 빠르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이 답답해 하거나, 또 다른 쪽이 이해못하는데도 덮고 넘어가는 일이 잘 생기지 않아서 좋았다. 학교 쪽에 계시면서 워낙 스토리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을 오랫동안 하셨고, 이번에는 정말 오랫만에 연출을 하시는 거라서 감독님도 나도 '간절함'을 수치로 나타낸다면 모르긴 몰라도 바늘이 끝까지 올라가 있다는 점이 통했다. 


우리의 작업 순서는 기획의도, 화별 줄거리가 나와서 모두 오케이가 떨어지면 그때 대본 작업을 들어가는 것인데, 지금 화별 줄거리에서 뒤집어라 엎어라를 한 세네 번 하면서 진도가 맘 먹은 대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줄기차게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구찌가 큰(?) 이야기는 제작사 대표님과 회의를 하면서 전체 줄거리를 잡아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이자 계속된 난관 봉착. 처음과 끝은 대충 알겠는데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너무나 밋밋한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안개속에 싸인지라 신비롭기는 커녕 눈코입 없는 달걀귀신들만 꺅꺅댔다. 없는 이야기 지어내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거대한 이야기 타래를 조선시대에서든 현대에서든 미래에서든 우주에서든 턱턱 잘 풀어내는 다른 작가님들이 정말 거대해보이고 존경스러웠다. 내가 쓴 원고는 처음  쓸 때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정말 오글거려 미치겠는 것이다.


갑자기 한 4년 전 여름이던가, 어떤 드라마 아카데미 면접볼 때 직원분이 면접실 앞에서 신신당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면접관들에게 '내 인생이 드라마'라면서 하소연 금지. 특히 결혼하고 나서 글을 써보고 싶어 오시는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면접관을 붙들고, 내가 살아온 삶을 써내려가면 대하드라마라며 눈물 콧물 짜시는 분들도 계시단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딱 그 짓거리 같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어? 하면서 원고에서 징징징징~ 거리고 있었다. 감독님은 지금 황서미에서 강토시(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 이름이다) 로 안 넘어갔다고 원고 볼때마다 계속 말씀하셨다. 내가 봐도 부끄러울 정도로 계속 내 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토시 이름의 기원?


그래서 아, 안 되겠다, 칼을 뽑았다. 그 칼은 바로 '캐릭터 만들기'

지금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명확히 안 잡혀있으니 줄거리에 이렇게 매가리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무엇보다도 쓰는 내가 너무 재미가 없었다. 즉 등장할 인물들의 장면에는 보이지 않는 전사를 만들어주고, 그의 버릇, 성격, 취미, 취향, mbti(?)까지 명확해야 그제야 살아숨쉰다. 마치 피노키오가 나무인형에서 조그마한 어린 소년으로 살아 숨쉬며 "아빠?" 하고 인사를 하듯. <피노키오> 이야기가 나왔으니...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에 나오는 피노키오가 디자인 될 때 나무 인형의 독특한 헤어스타일, 뒤로 바람에 쓸려간 듯한 모양으로 결정한 이유를 듣고 그 세심함에 놀랐다. 분명히 제페토가 이 인형을 만들었을 때 술 한잔 걸치고 만들었을 거라는 것. 그래서 처음에는 공을 들여 조각하다가 나중에 뒤로 가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중간에 관뒀다는 뒷이야기가 그 디자인에 숨어 있다. 이렇게 안보이는 전사가 탄탄하면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개연성이 생기고 그것이 연결되었을 때 깨알 재미를 찾을 수 있다. 

'나'를 쪽 빼고, 주인공 만들기. 일단 나는 주인공에게 어린 시절의 커다란 시련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련을 이겨내는 버릇과 방법으로 체육관에 가서 샌드백 두들기기라는 설정을 만들어주었다. 폐소공포증이 생기는 바람에 어느 공간을 들어가든 늘 출입구를 찾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문고리를 한 번 만져봐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다. 그녀의 엄마는 사기꾼이다. 빵을 들락날락 하는 사람이다. 아빠가 사기 쳐서 감옥가는 건 많이 봤어도 엄마가 사기꾼인 것은 희대의 장영자 언니 말고는 이런 설정을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헛발질 같이 깨갱! 남들이 예상 못할 곳을 짚어본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 엄마 캐릭터 그대로 가져다 썼더니 쓰는 내내 우리 엄마 욕밖에 할 것이 없었다. 가끔 더 악하게 끌어내려야 할 때도 '우리 엄마'인지라, 신라면 매운맛으로 팍 가줘야 하는데 자꾸 너구리 순한 맛에서 끝나버렸다) 토시의 언니는 이름이 백조다. 둘 다 모두 엄마가 지어놓은 이름이다. 자식 이름을 지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놀림을 당할까 굉장히 많이 신경쓰는데, 이 엄마는 하나도 신경 안 쓴 티가 팍팍난다. 자기 마음대로 지은 티가... 여기에서부터 엄마의 성격과 성장 환경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백조는 어려서부터 심한 아토피 때문에 밖을 잘 나가지도 못하고 학교도 다 못 다녔다. 하지만 어쩜 그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다. 

'너'를 쪽 빼고, 주변인물 만들기. 사실 이게 정말 어려웠다.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내가 경험했던 것에서 아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기억의 한 조각이라도 걸쳐 있게 마련이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섭섭했던 사람도, 나를 칭찬했던 사람도, 뒷담화하고 욕했던 사람들도 모두 들어간다. 하지만 그 철칙은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캐릭터에게 이유를 주고, 사랑하기. 내가 이 친구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악한이라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 주기. 그리고 일말의 측은한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장치해두었다. 


더글로리에서 문동은이 김밥을 먹는 이유도 다 있다. 분식집 떡튀순을 빼고는 상을 제대로 차려서 먹는 장면이 없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김밥 한 줄, 그것도 호일로 싼, 김밥 한 줄로 그려낸 것이다. (그리고 더럽게 맛 없어보이게 먹기도 한다.) 그리고 주여정의 발포 비타민... 사실 이건 한 10년 전에 발포 비타민 자주 먹을 때 생각했던 것인데, 꽤 안정 효과가 있다. 그리고 비주얼 상으로도 너무 멋있다. 김은숙 작가가 그런 소재를 아주 잘 찾는다. 발포 비타민 비슷한 간지나고,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만 같은 소재를 찾으려고 해도 사실 아직 못 찾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오르골이었는데... 이런... <미스터 션샤인>에서 쓴 소재다. "원래 이고 니꼬자나." 오르골을 앞에 두고 나온 그 유명한 대사다. ^^;;


이렇게 만들어두었는데도 그래도 한 번 더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이번 드라마 작업하면서 정말 많이 배운다. 나를 뛰어 넘어야 비로소 입체적인 캐릭터가 나온다는 것,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가져다 쓰더라도 한 번, 두 번, 아니 세 번이라도 더 꼬아서 빚어야 비로소 빛나는 캐릭터, 자기 호흡과 목소리를 갖춘 캐릭터가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 가 아니라 배워간다. 여전히... 

그러니까 내 주변에 있는, '내 이야기 쟤가 쓰면 어떡하나' 겁이 나는 분들은 절대 안심하시기 바란다. 어제도 딸이랑 이 이야기로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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