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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02. 2023

기획안 산, 어디까지 가봤니?

드라마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 소요되는 A4 용지 매수는?

지난 번 글이 '망망(막막)대해'였다면 오늘은 '산 넘어 산'이다.

한 2년 전에 공부 삼아 드라마 <또 오해영> 기획안을 구해 본 적이 있었다. 화당 3억 5천이 소요된 드라마, 총 56억 원이라는 돈을 끌어왔다는 이 드라마의 기획안 첫 장에 너무나 귀엽게도 오타가 살짝 끼어있어서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을 넘기면서 정작 문제는 그런 오타 따위가 아니었다. 맨 앞에 로그라인 나오고, 기획의도가 펼쳐진 후 관전 포인트 땅, 땅, 땅 세 개 정도를 꼽아서 보는 이들의 눈에 쏙 들어오게 했다.

(혹시 몰라서... 로그라인이란 이야기의 줄거리를 단 한 줄, 혹은 두 줄로 요약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야? 했을 때 딱 이 한 두 줄이 나오지 않으면 작가가 초장부터 길을 잃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한다. 사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쓰다 보면 길을 찾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 여하튼 드라마 아카데미나 영상 아카데미에서는 이 로그라인 잡기 연습을 많이 시켰다.)

그리고 나서 캐릭터 소개에 이어 화별 줄거리가 쉴 새 없이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각 화 이야기를 대충 두세 줄로 써놓고 만 요약본이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중간 중간 대사까지 생동감있게 들어가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쇼크를 잡순 부분은 이거였다. 기획안 '장 수'... 매수 말이다.

그 전까지는 시놉시스 하나도 제대로 안 써봤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드라마 아카데미 다니면서도 시놉시스 제대로 완성시켜 본 적 없이 덥썩! 쓰고 싶다고 대본부터 들어갔었는데(또 이게 그냥 그런대로 가능했다) 기획안 하나에 35장 가까이 되었다. 아... 원래 큰 돈 들일 드라마를 제대로 쓰려면 그냥 쓰는 사람 한 명의 개인기만을 가지고 드리블하고 묘기부리고 난리 염병 떨 것이 아니었구나. 이날 처음 알았다. 준엄한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에이~ 어떻게 기획안을 서른 장씩이나 써. 그냥 <또 오해영>만 이렇게 좀 자세하게 썼겠지 하는 생각은 했었다.


지금 내가 쓰는 드라마는 '이혼'이라는 주제를 놓고 전체 내용이 세 번 엎어졌다. 그리고 네 번째 쓰고 있다. 반 년째 사투 중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고3 이후로 가장 어딘가에 몰두하는 시절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 더 몰두하기는 기력도 쇠해지고, 눈도 침침하고, 손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불가능이다. 지금이 최선이다.

처음 엎어진 기획안은 기억도 잘 안 나고, 두 번째는 아기 무당이었던 친구가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이혼 상담해주는 이야기, 세 번째는 세 명의 같은 학교 법학과 출신 비혼, 이혼, 기혼 상태의 친구가 맡은 이혼 이야기, 네 번째가 지금 쓰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최연소, 최다 결혼 기록을 남긴 한 여자의 유쾌한 기승전결.

정말 나 혼자 쓰라고 했으면 이렇게 이야기의 모서리가 딱딱 잡혀지지 않았을 텐데 감독님이 지금 조력자로서 정말 많이 도와주고 계신다. 얼마 전 정서경 작가의 인터뷰 동영상을 보다가 이런 표현을 들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 저는 여전히 '박찬욱' 학교의 학생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각 기획안 마다 당연히 35에서 40장의 A4 용지가 들었다. 맨 처음 기획안 쓰고 단톡방에 원고를 보낼 때 이런 톡을 남긴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기획안을 어떻게 서른 장을 넘게 쓰나 했더니, 저도 쓰다보니 되네요]

기획안만 지금까지 한 A4 150장은 쓴 셈이다. 괜찮다. 안 힘들다. 기획안이 통과하기만 한다면...

나는 초짜 작가여서 그냥 다른 거장이 작업하시는 것과 같이 "저는요, 그냥 써요. 1화 쓰면 2화 넘어가고 그리고 또 넘어가고 그러다 보면 마지막화를 쓰고 있어요."(정서경 작가) 이렇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제작사에서도 내가 그러면 기함했을 것이다. 기획안 안에 캐릭터 설정과 화별 줄거리까지 자세하게 들어가 있다. 각 사건의 나열 뿐 아니라 당연히 다음 화까지 클릭해서 보게 만들 '훅'을 잡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내가 지금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어서 (아는데, 안 써져...) 오늘은 드라마 <더 글로리>를 골라서 화별 엔딩과 다음 화 시작을 노트에 적어 분석하고 있다. 김은숙 작가가 아주 이렇게 마지막에 별 신세계의 내용까지 잡아 끌어와 배치하는 바람에 와 XX~ 하고 욕이 다 나와도 결코 다음 화 클릭을 안 해볼 수 없게 만드는 데에 귀재다.


지난 화요일에는 기획 회의를 했다.

내가 왜 제목에서 산, 어디까지 가봤냐고 물었냐면 매 회의가 산 넘어 산이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앞으로 열 두 번은 더 넘어야 한다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당부하셨다. 우리 기획안의 가장 첫 번째 산은 제작사다. 내가 드라마 내용 한두 장 잡고 제작사랑 컨택해서 제안하고 그럴 위치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드라마 첫 산은 제작팀일 것이다. 그렇게 오케이가 되고 나면 본격적인 대본 작업에 들어간다. 나는 지난 반 년 넘게 계속 기획안만 썼지, 대본을 안 써봐서 감을 어떻게 잡을 지도 걱정이다.

회의실에 앉은 우리 셋.

- 지난 번 안에서는 못 봤던 세계관들이 엄청나게 펼쳐졌어. 완전히 종합선물세트가 되어 버렸어요.

감독님이 물으셨다.

- 좋은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거죠?

- 아, 그럼요. 이야기가 엄청 발전을 한 거야. 그런데...

휴우~ 이렇게까지 된 이상 '그런데' 뒤에 쏟아질 폭풍우는 내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대본이 나오고 난 후에는 각 플랫폼과 방송사에 돌린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넷플릭스 같은 데에서는 내부에서도 경쟁이 무지 치열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기획을 밀고 당기느라 정신들이 없단다. 그 안에서 산을 한 네댓 번은 넘어야 한단다. 그리고 거기서 무사 통과가 되면 홍콩 갔다가 미국 본사까지 가서 회신을 받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지금 딱 동네 뒷산 겨우 헥헥대며 오르고 있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좀 전 '산 넘어 산' 이미지 찾아보다가 웃겨서 가지고 와봤다. 어차피 1안으로 갈 것 알지만 계속해서 빻아야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예전 회사 다닐 때 회의실 풍경이 떠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네. ㅋㅋㅋㅋㅋㅋ

혹시... 하고 운을 떼면 "그럼 니가 다 해봐." 이런 야만적인 회의 시간 말이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나가는데, 대표님이 나한테 양손 하이 파이브를 하셨다. 기분 좋을 때면 늘 양손을 뻗치신다. 그리고 이 말도 잊지 않으셨다.

- 스토리가 뭔가 계속 발전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된 거야.

나는 다시 1안으로 가지 않는다. 모든 작가들은 '최고의 이야기' 뽑아내기 위해서  고지를 향해서 달리고 걷고 넘어진다. 내가 쓰는 이야기도 아직 최고가 되려면 멀었고,  회의에서도 수정사항을 잔뜩 받아가지고 왔다. 어떻게  난제들을  저며낼 것인가가 숙제다. 치열한 회의가 끝나면 보통  2-3 정도 내게 휴식시간을 준다. 오늘이 이틀 째다. 내일까지 뇌를  비우고, 쉬게 해볼까 싶다.  



그날 저녁으로 먹었던 정말 맛있는 음식들.

성수동의 '무로정'이라는 곳인데 미리 예약하면 꽃도 선사한다. 분위기도 좋았고, 음식도 정말 맛있었고... 무엇하나 대충 개발한 메뉴가 아닌,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와인 전문가 급인 감독님이 골라주신 와인. 

같이 기획안을 준비한 입장에서 감독님도 속으로 엄청 긴장을 하셨나보다. 와인 한잔 하면서 말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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