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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14. 2023

모든 것엔 때가 있다.

왜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파일을 발견했다. 제목은...

2021년 9월에 썼다고 하는데, 도무지 왜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한글 파일을 하나 발견했다. 폴더는 '에세이 학교'. 대부분, 글을 썼을 때의 상황과 이유를 대충이라도 기억을 하는데 이건 대단하다. 진짜 1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1.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리고 합이 있다. 

드라마 쪽 가서 왜 망했을까. 합이 맞지 않았기 때문. 때도 아니었을 수 있다.      


2021년 3월부터 나는 한 드라마 제작사의 팀에 들어가서 이미 기획이 된 스토리를 가지고 대본을 쓰는 작업을 했다. '늑대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왜 여기에서 늑대가 나오고, 과거로 갔다가 어떻게 현재로 돌아오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대본은 쓰고 싶었다. 끝까지 매달려야 했다. 이건 어쩌면 하늘이 주는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인생은 실전이다. 종만아... 

내가 열심히 써왔는데, 같은 화에 똑같이 다른 작가가 쓰고 있었다. 뭐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나야 배우는 입장이니까... 왜 '바닥 끝까지 내려가서 쓰지 않냐'는 질책을 들었다. 



도무지 대표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표님은 늘 모호하게 설명하시는 데에 일가견이 있으셨는데, 그걸 알아듣고 이해하는 피디님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한 번은 <나의 아저씨>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좋아하냐고 물으셔서 거기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너무나 깨알같이 재미나고, '정희네'라는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순박한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었다고 대답을 했더니, 돌아오는 질문이 이거였다. 

- 혹시... 사회적인 관점에서 메시지를 얻는 건가요? 

여기에 뭐라고 대답을 하냐고. 나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끝까지 내려가서 쓰는 게 뭔지 모르겠다만, 아마도 내가 이 이야기에 깊은 이해도 없이 그리고 애정도 없이(노잼이었으니까) 썼던 것은 사실이고 그걸 들킨 것이 아닌가 추측만 할 뿐이다. 

결국 나는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서 그만 두겠다고, 많이 배웠다고, 그동안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나왔다. 그뒤로 내상이 상당히 오랫동안 갔다. 글만 쓰려고 하면 가슴이 쿵덕대고... 

그러던 중, 내 친구가 딱 한 마디 청량하게 던졌다. 

- 합이 있어. 다... 일하는 데에도 합이 있어요. 그 결이 서로 안 맞은 것 뿐이야. 

사실 '때'도 아니지 않았을까 싶고. 모든 일은 다 '연'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합. 때. 연. 결. 


2. 
 삶창 오픈 파티에서 왜 나는 책을 안 내주는 거냐고요. 엉엉.... 울었던 창피했던 날들. 그때 책 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지금 내 글도 4-5년 뒤에 보면 부끄러워서 난로 위 오징어처럼 오그라들 수도 있다.      


지금 열 살이 된 만두가 두세 살 때, 한 출판사에 들어갔다. 역할은 손에 잡히는 일 다 하기. 아침에 각 도매 서점에서 들어온 주문 취합, 청소, 가끔 기회 닿으면 교정 교열(이건 내가 관심이 많아서 억지로 달라고 해서 했다), 그리고 인쇄소, 지업사, 제본사 입금날 조정 및 읍소 통화... 

들어가자 마자 보니 이 사무실이 새로 이사를 했단다. 그래서 집들이 잔치를 벌이는데... 문어 숙회에 꽁치, 청어 과메기를 준비해서 많은 분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안주가 안주이니만큼 거대하고 따뜻한 술판이 벌어지는데....

갑자기 내가 왜 내 책 안 내주냐고, 나도 책을 내고 싶다고 운 거다. 아, 지금 생각하면 창피해서... 글이라고 해봤자 겨우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 쓰는 나를 누가 믿고 책을 내자고 하겠냐고. 그리고 그때 냈으면 정말 큰일 났을 뻔했기도 하고, 어쩌면 편집자님에게 좀 더 일찍 크게 배웠을 수도 있었겠고.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그때다. 그날 대표님은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리는 나에게 적잖이 놀라고 민망하셨던 듯 하고. 

하지만 수 년이 지나 여전히 얼마 전 도서출판 삶창 대표를 역임하고 계신지라 미팅을 하고 왔다. 사람 일이란 참 모른다. 몰라. 

 

3

팟캐스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듣고 한 출판사에서 찾아옴. 

<직업 열전> 정도로,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해 책으로 써달라 했음. 
 목차도 잡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뭔가 싸한 기분.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런 신기 같은 것이 내게 있는 듯. 

담당 편집자가 다른 파트로 옮겨가고 등등... 다 변명이겠지만.. 중간 무산. 

메인 카피가 성 다른 아이 네 명을 낳은 여자가 이것저것 닥치지 않고 한 일들. 어쩌구... 였는데 내 신기에 따르면 그것이 문제였던 듯. 그날 저녁에 을지면옥에서 누군가랑 약속이 있었는데 미리 가서 소주 한 병 나발불고 울었음. 너무너무 속상해서. 

그런데, 이 케이스도 마찬가지 그때 책 냈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 

일단 애 키우느라고 굉장히 산전수전 겪은 애처로운 엄마, 젊어서 사고는 다 쳐놓고 뒤에가서 수습하느라 고생하는 한 여자처럼 라벨 이마에 딱 붙어서 살지 않았을까.      


아, 이건... 정말 슬펐던 실패담 중에 하나. 

예전에 '돈없수다'라고 여자 네 명이 팟캐스트를 한 적이 있다. 싱글로 살면서 한 달에 돈 엄청 많이 버는 여자1, 귀촌해서 나름대로 사업을 일구고 사는 여자 2, 싱글로 발레와 글 쓰기 등을 하면서 나름대로 사는 여자 3, 그리고 여자 4. 그중 나는 '파산의 아이콘' 여자 4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팟캐스트를 어떤 유수의 출판사 편집자가 듣다가 나에게 컨택을 했다. 그때 들었던 질문이 정확히, 깔끔하게 이거였다. 

- 혹시, 책 쓰실 생각 없으세요?

................................

왜 없겠어. 내가 책 내고 싶어서 그 좋은 술자리에서 왜 내 책은 안 내주냐고 떼 쓰며 울었는데... 그래서 기획안 열심히 준비해 가고 회의 한 세 번 하고, 계약서도 쓰고 그랬는데.... 중간에 시기상조라며 파기됐다. 

'성 다른 아이 네 명을 낳은'이라는 메인 카피를 자극적으로 뽑은 그들... 씁쓸했다. 

계약 파기된 저 날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을지 면옥에서...


4. 

시놉시스의 중요성. 

긴 글을 쓸 때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때 그것이 횃불이 됨. 

처음에는 그냥 막 덤볐다. 시나리오로 바로 들어가고. 결말도 나도 몰라. 

그렇게 해서 완성할 천재는 단연코 없을 것. 무엇보다도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갈 꾸러미 마련하느라 그 긴장감에 못 쓸지도 모름. 백발백중 이야기가 사공을 싣고 산으로 흘러감.      


드라마랑 영화까지 아카데미 혹은 무슨 무슨 코스라고 네 군데를 다녔다. 심지어 여의도에 있는 무슨 영화 배우는 곳에서는 면접에서 떨어졌네... 아니 내가 내 돈 내고 다니겠다는데 떨어져서 상당히 마음 상했었다. 그런데 이 네 군데에서 이런 저런 스킬들도 많이 배웠지만, 시놉시스에 대한 중요성을 배웠다. 로그라인 없으면 다음 이야기 못 쓴다고 겁 주기도 하지만 난 전혀. 하지만 전체 줄거리를 끝까지 다 잡고 가는 것은 몹시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찰흙을 척척 쌓아 얹는 데에 익숙했다가 이제는 커다란 돌 덩이 놓고 정으로 쪼아 들어가는 듯한 느낌의 작업방식이 된 것 같다. 


5.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것. 

잊지 않는다. 

내 글들이 사적인 경험에 국한되어 있다는 지적들을 가끔 받는다. 

그러니까 내 얘기만 계속 쓴다는 이야기다. 

사실 현 시국을 분석할 능력도 안 되고, 트렌드를 읽을 눈도 없으며, 우리 여성들의 자리를 굳히기 위한 전투력도 미약하다. 

무엇보다. 

그럴 생각 없음.     



6. 

쓰는 내가 재미있어야 글도 재밌는 것인데, 일로 글을 쓰다 보면 진도 정말 안 나가고 한땀한땀 식은땀 흘리게 되는 글도 좋게 나올 때가 있더라. 쉽게만 보면 안 될 것. 글 빨리 쓰고 휘리릭 일 쳐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글이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이 말은 맞다. 일 휘리릭 쳐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7. 

매사에 모든 생활에서 글감 만들기. 지금 쓰는 글이랑 매칭해보기. 캐릭터 만들어보기. 

김은희 작가가 한 말. 

고치고 또 고치고 .... 그냥 고치는 작업일 뿐. 완성본이 없다. 이것도 김은희 작가가 한 말. 

킹덤은 백 번 고쳤다고 함. 정말?       


나도 오로지 길은 '퇴고'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고치고 또 고치고... 


8. 

고스트 라이터. 야설 교정작가. 참 웃긴 일도 많이 함. 한 달에 딱 백만 원만 더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날들.      


야설 교정을 한 적이 있었다. 작가님들이 아이디어는 대단한데 필력이 진짜 좋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원고 받아들고 얼굴 벌개지고 흥분했는데, 나중에는 진짜 프로페셔널하게 안 꼴리고 교정가능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 요즘도 한 달에 딱 백만 원만 더 벌었으면 좋겠다. 물가가 너무 올랐다. 체감 물가를 체감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 듯하다. 


9. 

이번 에세이에서는 엄마, 아빠, 부모님 이야기를 아주 많이 순화하고 뺐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의 영화도 자전적인 스토리. 

다들 나의 이야기를 그대로 갖다 베끼면 안 되고, 거기에서 한 발 떨어져 이야기를 푹 떠와야 한다고들 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다시 벌새 이야기를 하면, 장면 장면 연출에서 아, 이건 감독이 경험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 장면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저 위에 보이는데, 햇볕은 내리쬐고, 눈은 부시고.... 엄마! 부르는데 엄마는 돌아보지 않는다. 내 소리가 안 들리나 하고 엄마!를 부르는데 그냥 스윽 못 보고 지나치는 것. 그날의 경험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떠와서 중학생 여자아이의 불안했던 마음을 표현한 것. 

나는 아직 한 발 떨어지는 연습이 덜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고, 한 발 떨어지는 중일지도 모름. 

내 어려서부터 이야기. 남편 다섯 명 이야기에 천착해서 거의 7년 8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완성을 못 했는데, 이것도 때가 있는 것이더라. 

내 인생에서 풀어야 할, 그리고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스토리는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엄마와 나의 관계였다. 모든 것은 다 모녀관계로 들어갔다. 

수많은 결혼도, 분노도, 어려서의 엄마 분냄새에서 얻는 편안함도, 외갓집에서 해 저물 때 느꼈던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도.      

벌새 시사회에 김보라 감독의 부모님이 오셨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지는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음. 아마 아무말 없으셨을 수도 있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화는 안 내셨다고 한다. 

나는 책에 부모님의 이야기를 민낯 그대로 넣고 싶은 대목들이 몇몇 있었는데 퇴고 과정에서 다 뺐다. 화낼까봐. 나는 성인인데, 이미. 그런데 영화에서는 오로지 내 얘기를 누구 눈치 안보고 해보고 싶다. 웹툰으로도 동시에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내 욕심이다.      


아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책이 아마 <시나리오 쓰고 있네> 내 첫 번째 에세이일 것이다. 여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내 진짜 이야기를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 고민이 상당하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전 글에 남겼다. 

내 어려서부터의 이야기, 나를 거쳐갔던 남편 다섯 명이 이야기를 7-8년이 되도록 못 쓰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썼다. 비결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나로 두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서 주인공 다른 여자로 옮겨 가는 데에만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나는 정말 드라마 한 편 쓰는데,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성격, 상황, 생김새, 말투 모두 모두....... 넣었다. 


10. 

부자되고 싶다. 마음만 부자 말고. 애들 데리고 식당 가서 야, 뭐 먹고 싶어? 맘대로 골라 봐. 이 말이야 많이 하지만, 속으로 수육 시킬까봐, 소고기 시킬까봐 쫄려 죽을 때가 많았음. 이젠 안 쫄리고 싶다. 이런 부자. 

그리고 남들한테 선물할 때도 인색하게 1-2만 원 깎지 않는 부자. 누구랑 만날 때 밥하고 술은 내가 사는 부자. 

지금 사는 동네에 집좀 .... 작은 평수라도. 내 집. 집 주인분 바뀔 때마다 내가 혈액 투석을 한 바퀴씩 하는 느낌이다.       


아... 집... '혈액투석을 한 바퀴 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어떻게 저리 썼을까. 
내 소원은 마음 넉넉하게 다른 이들 만날 때 밥과 술 사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려고 노력 많이 한다. 요즘도...

다 때가 있다. 있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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