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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Mar 11. 2023

쉬는 날

그래, 멀리 떠나자.

지난 번 기획안 회의에서 대대적인 수정 요청을 받았다. 게다가 이야기 얽는 것에 바빠서 기획안 등장인물에는 있는데, 막상 시놉에 가면 처음 한 번 나오고 안 나오는 사태도 벌어지고 말이다. 찰흙으로 치자면 이제 점점 형태는 잡혀져 나가고는 있는데 코가 하나 없다든지, 손가락이 네 개... 이런 상황이다.

감독님은 계속 이쪽 드라마 업계 쪽 이야기를 전해주신다. 한 마디로 '장난이 아니'라는 것. 천 대 일, 백 대 일, 그리고 십 대 일까지 올라가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십 대 일, 10등까지 올라가도 그동안 트렌드 지나가버리거나 재수 없으면 수많은 세월을 갈아 넣고도 드라마 제작도 못 들어간다는 얘기다.

지금 나는 반 년 넘게 이렇게 기획안에 고군분투 중이다.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두 번째 기획안에서 <신성한, 이혼>이 크랭크인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다 갈아 엎었다. 나도 이혼 이야기를 드라마로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정확하게 기혼, 이혼, 비혼인 세 여자 이혼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사람들 머릿속의 아이디어, 하늘 아래 새 것 없다는 것을 실감하던 순간이었다. 과감히 엎었지.  내 기획안에 씨 뿌려놨으면 지금 뭔지는 몰라도 엄청 파랗게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다. 하도 많이 갈아줘서.  


지지난  회의를 마치고 진짜 고민이 많이 들었다. 허리가  좋아서 하루에 적어도 나가서 오천 보라도 걸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서 운동도  나가겠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운동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천하의 봉준호도 그러한데  같은 피래미가  그럴리가. 거장도 이런 조마조마한 마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마음을 다잡고 억지로 나갔다. 비록 나갔다가 10 밖에  걷고 들어올지라도... 우리집 뒷산 데크길이 조성이  되어 있다. 나같이 등산 못하는 사람은 천천히 걸으면 좋을 길이다.

훗훗 심호흡하며 걷고 있는데  생각이 번쩍 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놉시스에서 당락이 결정된다면? 시놉 재미없으면 그냥 버린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어차피 그렇게 버려질 거라면... ( !) 시놉시스의 어투를 바꿔보자.  뭐뭐뭐뭐 했다. 이런 문장의 마무리로  필요가 없지 않나. 그리고 내가 쓰는 이야기는 여자 원톱 주인공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독백하듯이 써봐야겠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전하는 말처럼... 어차피 과거 현재 왔다갔다 하면서 진행하기도 하니까. 어차피 지금 전국을 들었다 놓는 것도, 연진아~ 독백 편지 형식 아닌가.

그랬더니 진짜 키보드에 천사가 내려앉은 듯 잘 써지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어디에선가 피드백을 받기 전에는 이게 잘쓴 건지 못쓴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에세이를 쓰는 것은 철저하게 나 혼자 파고들어가서 완성시켜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성도를 마음으로 측정할 수 있었는데, 드라마로 온 후에는 그 느낌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다.


과거의 ‘나’에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떨까 상상해봤어. 과연 지금의 나인 상태로 20년도 더 전인 그때로 돌아갔다면 어떨까. 나는 좀 더 똘똘하게, 적어도 다섯 발 앞서 보고 결정을 내렸겠지. 나는 그 옛날의 나, 즉 너가 측은해졌어. 다시 돌아가라면 그대로 땅으로 꺼지고 싶을 그때를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을 너를... 잘 들어. 이제부터 너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네 앞에 겹겹이 쌓일 거야.
  

내 기획안 시놉시스의 첫 단락이다. 이 파일을 보내고 이틀 뒤에 감독님께 연락이 왔다. 일단 이 형식으로 쓰니 주인공의 심리가 더욱 명확하게 읽힌다고 하신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는 잘 알지만, 이 기획안의 실질적인 첫 독자인 PD들, 제작사 관계자 등 '읽는 사람'들이 그걸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하신다. 오케이. 나도 그 부분을 걱정했었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험성'보다는 '안전빵'을 추구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한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그랬지... 출판계에서도 사실 '무엇'을 쓰는가 보다 '누가' 쓰느냐가 판매부수에 훨씬 더 폭발적인 영향을 미친다. 김은희, 김은숙, 박해영, 노희경 작가 정도되면 아마 기획안이나 대본 가지고 얼마든지 실험을 해도 적어도 업계에서는 작가의 의도에 대해 이해라고 해보려는 노력을 해볼 것이다. 그러나, 그걸 내가 썼다? '이게 뭐야?' 소리 나오는 순간 바로 쓰레기통행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매일 이렇게 긴장하고 살 수가 없어서 다음 기획안 전체 회의 하기 전까지 좀 쉬기로 했다. 그것도 편안하게 놀 수가 없어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본집을 읽어보고 있다. 드라마 속의 고래의 등장과 우영우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을 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장르 자체가 판타지가 아닌 드라마의 판타지를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드라마를 쓰는 것은 42.195KM로도 어쩌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마라톤이다. 그리고 최악의 혹평에 늘 멘탈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수정사항이 쏟아져도 표정관리 잘 해야 한다. 자자, 커몬! 수정 사항 다 얘기해봐라! 내가 쫙쫙 흡수해주마! 이런 표정... 그리고 스트레스로 위가 쪼그라들 때, 위산이 분출할 때를 대비해 양배추죽, 잣죽 보양식도 준비해야 할 일이다. 반면에 와, 만세! 를 부를 순간은 아주 짧다. 드라마 처음 쓰는 나는 지금까지는 그랬다. 앞으로 얼마나 더 좋을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이 느낌을 기록한다. 훗날 두 번째, 세 번째 드라마를 쓸 때 이날, 이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 놓지 않아서 그저 과거로 흩뿌려 놓치는 지금의 소중한 감정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한다. 아, 그리고,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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