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섬 Mar 12. 2023

통찰력을 담은 대사란

백만 년 전 강의록 파일에서 화석을 발굴하다.

대본을 쓰고 싶어서 드라마 아카데미, 무슨 무슨 영상원 등등 네 군데에 걸쳐 다섯 번 정도 강의를 들은 것 같다.  강의듣는다고 몇 개월 할부로 해서 끊은 것만 해도 천만 원에 육박할 것이다. 오늘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때 그 시절, 강의 들었을 때 선생님 말씀을 받아 적은 강의록, 숙제 파일 등등을 들춰보았다. 지금 보니까 한 5년 전에도 대본 잘 썼네(ㅋㅋㅋ) 당연히 구성이 약하니, 스토리는 끝에 가서 어쩔 줄 모르고, 뭉개고 있지만... 대사는 누가 쓰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재미있어서 신나게 쓴 것이 눈에 보인다. 


그중 <선생님의 메모>라는 파일이 있어서 클릭해봤다. 드라마 맨 처음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단톡방에다 남기신 메시지를 내가 캡쳐해서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놨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성실한 학생이었구나! 그리고 그때는 정말 간절했었다. 선생님 눈에 잘 들어서 어느 보조작가 자리라도 하나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실 이건 '불가능'이었음을 얼마 안 가서 알게 된다...)

이 선생님은 숙제를 내 주고는 차례가 된 사람을 맨 앞 자리에 앉혀 놓고 변명 1도 못 하게 하고 그냥 들으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수강생들이 돌아가며 이 대본에 대해 갈기갈기 비판을 해야 했었다. 이것도 하나의 훈련이라며... 아마 옛날에는 드라마 회의할 때 작가들 이렇게 깨지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나보다. 사실 지금 나도 이렇게 깨지고는 있다. 아주 당연하게 수정사항도 산더미처럼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훈련 방식은 진짜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건 변함없다. 나는 그 야만적이고 독재적인 수업 방식이 '존나' 맘에 안 들어서 점점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고, 수업 2시간의 반을 자기 대학 때, 80년대 학생운동 하던 이야기로 가득 채웠던지라 금싸라기 같은 내 돈 생각에 불만이 극에 달하던 중...  

숙제로 만들어 간 대본을 보자마자 파란 형광펜으로 크게 X자로 죽죽 긋더니 아무런 설명 없이 Back to Basik! 이라고 쓰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하하 우습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시발, 이걸 사진 찍어서 페북에 올려 말어.... 하다가 그냥 인생이 불쌍해서(?) 관두고 종강 1주 앞두고 박차고 나와버렸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선생님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단톡방에 남긴 이 말씀... 왜 이렇게 23년 3월 12일을 사는 나에게 큰 울림으로 남는지.


- 말 그대로 “생각”은 작가의 “생각” = “통찰력”을 통해, 독특하게 읽어낸 작가 만의 “생각, ”사고“, ”해석“임.

- 고로, “삐딱한 기질”의 사람이 유리하며, “착한 아이 콤플렉스”및 “착한 어린이”들은 당연히 불리함. (당연하지, 가장 중요한 "왜 why?"라는 질문 따윈 던져 버리고, 기냥 남들 따라 우루루, 시키는 대로 우루루, 남들 눈치 보며 우루루...하다 보면 뻔한 “교과서” 말고는 머릿속에 자라나질 않으니. 그래서 자꾸 몇몇 분들께는 다 집어치우고, 일단 “삐뚤어지기부터 해라” 라고 말씀드리기도 함)


- 그럼 “삐뚤어지기”만 하면 되느냐. 그건 아님.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건 “솔직”“진정성” “위선 따위 개나 주라 그래” 라는 마인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함. (- 여기서 잠깐- 이런 마인드를 갖고 분석, 해체 해야 할 대상 제 1위는 당근 "나 자신"임. 내가 얼마나 그지 같은 인간인가,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진짜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다, 누누히 말했던 것과 관련 있음. - 다시 각설하고!) 문제는 우린 모두 이런 거 이미 다 알고 있다는데 있음. 


그럼 왜 작품에선 안 나오느냐. 스스로,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으나 체면상, 분위기상, 사회적 예의상, 대강 눙쳐 버린 "습관"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허덕 허덕 하루 하루를 일상에 쫓겨 (혹은 삶에 잡아 먹혀) 언제 부터 인가 "생각"하는 법을 잊어 버린" 댓가 일 수도 있음.  


나는 체면상, 분위기상, 사회적 예의상, 대강 눙쳐 버린 습관과 동시에 어느 순간 허덕허덕하며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댓가가 뭔지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내가 얼마나 그지 같은 인간인지, 주눅들어 살고 싶지도 않고, 거기에 대해 파헤치는 행위 자체에도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벼린 칼로 슬라이스 해서 들여다 보는 훈련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무한대로 미분해서 나를 바라보기. 

순하고, 말랑하고, 주변에 웃음과 따스함만 주는 사람이 되는 건 이미 글렀다는 건 태생적으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평화로운 잔잔한 호수처럼 보이고 싶어서 환장을 했었는지...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사탕을 줄 때보다, 바늘로 콕 찌를 때 아얏! 하고 소리를 지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멋있어 보일 때는 단연코 사탕을 받으며 침을 줄줄 흘리고 활짝 웃는 때보다, 누군가 이를 악 물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길 때다. 이 '멋짐 폭발'의 순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속은 곪지. 당연히... 

파일 속으로 계속 클릭하며 유영을 하다보니 이 밖에도 강의록에 이런 통렬한 일갈들이 잔뜩 쌓여있다.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든다. 우주 최강 투덜이, 지금도 어디서 강의하고 있더라... 하고 내 레이더에 걸리면 속으로 흥! 미친x... 그랬었는데...


드디어 드라마 <더글로리2> 공개되었고, 주말 내내 sns가 더글더글거리고 있다. 전 세계까지는 아직 반응을 모르겠지만, 전국은 확실히 김은숙 작가의 손끝 하나로 들었다 놓고 있다. 

상상해봤어, 연진아.  이번 주말, 넌... 얼마나  신나고, 통쾌하고, 일 분, 일 초가 감미로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시공간... 하지만 혹시 몰라, 연진아. 신이 내게 김밥 꼬랑지만 들고 먹으라고 명한 적은 없잖아. 기대해. 나 지금 되게 신나.  

매거진의 이전글 쉬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