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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Mar 19. 2023

될 때까지 팬다.

드라마 기획안 또 통과 못했습니다, 네. 

기획안 회의를 앞두고, 열흘 전쯤 밀리의 서재에서 <드라마 작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드라마 작가 연구 논문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잠시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와, 무명 작가 생활 10년은 기본이고, 20년까지 버텨야 한대요. 이 이야기를 감독님께 해드렸더니 심산 스쿨에서 정의하는 데뷔 공식은 '돈 하나도 안 벌고(즉 누군가 서포트를 해주거나 이미 자금을 마련해놓았거나), 무조건 쓰기만 파고들어서 7년이란다. 판검사 났다, 아주... 

작가 1번부터 15번까지 익명으로 심층 인터뷰한 걸 보니까 입이 쩍 벌어졌다. 끝 번호 두 명은 그나마 스타작가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전히 등산객들이었는데, 그들의 현실이 참담했다. 막노동을 하면서 글을 쓰는 한 작가는 말하기를 나가서 일 하고 오는 날은 글 못 쓴다고 했다. 속으로 당연하지! 하면서 그럼 글은 언제 쓰나 하고 내 일 같이 여겨졌다. 심지어 어떤 작가는 드라마 한 편을 계약하고 써내고도 자리를 못 잡아서 헤매는 것에 가슴이 많이 아팠다. ㅠㅠ 아니 너무 공포스러워서 읽다가 토할 뻔했다. 진짜로… 끝까지 못 읽었다.


지금 나도 기획안만 붙잡고 지금 거의 반 년이 넘어가고 있다. 지난 여름 감독님하고 제작사 대표님하고 나, 이렇게 셋이 첫 미팅을 한 것이 한 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때였다. 종종걸음으로 치마 다 젖어가며 미팅 장소로 나갔고, 감독님은 아예 바로 눈 앞에서 나무가 쩍 갈라져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고 했다.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가지고 오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지금은 봄. 이제 조금 있으면 장마네 뭐네, 기온이 30도가 넘네 마네 하면서 또 떠들썩 할 테니... 그럼 일 년이다, 일 년. 드라마는 평균 기획부터 제작까지 3년 걸린다고 치고, 이제는 마음이 굉장히 급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했는지, 성북동에 메시지 잘 읽어주시는, 나의 단골 타로집에 가서 도대체, 우리 기획안 이거 언제까지 삽질하면 되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시간도 없었고, 왠지 이번에는 타로의 메시지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나 혼자 쌩으로 버티고 싶어서 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기획안 첫 장에서 까이면 바로 휴지통 행이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번 기획안은 파격적으로 1인칭 시점으로 다 바꿨다. 40장이 넘는 기획안을 또 한 번 다 들어엎은 셈이다. '뭐뭐뭐 했다.'로 끝나는 보통 기획안보다 읽는 사람의 멱살을 잡아매는 편지글 형식으로 바꿔보면 좀 튈 것 같다는 계산이었다. 요즘 세계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전국, 한국 사람들을 들었다 놓은 '연진아' 열풍에 한 발 걸치고... 


피디님 두 분과 제작사 대표님, 그리고 감독님과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쉬는 시간도 없이 세 시간 동안 뜨겁게 회의를 했다. 이 1인칭 기획안을 가지고... 연역법, 두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시 써야 한다. (쿠궁!) 

1인칭으로 들어가니 주인공 여성에 대한 심리 묘사는 상당히 깊이 묘사 되었지만, 주변 인물들이 사라진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전 기획안에서 보이던 사건의 단계별 역동성이 약해졌다는 의견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안 사랑스럽다는 의견은 여전했다. 읽는 사람들이 이 주인공에게 두 손들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단다. 사실 이 의견이 나왔을 때, 나의 마음은 폐허가 되어 한 줄기 바람이 쓸고 갔어야 했지만 왠지 이번에는 그렇게 세게 맞지 않았다. 나도 이제 슬슬 맷집이 생기는 것일까. 아니다. 1인칭으로 한 번 들어갔다 나온 것, 그 과정을 거친 것이 든든했다. 한 번은 이렇게 쓰고 나오니 더 큰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봉을 획득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케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수많은 작가들 중에 특히 철저하게 협동 작업을 해내야 하는 드라마 작가들이 오로지 혼자서 심연을 파고드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몇 자기 더 갖춰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수정 요구를 받는다 해도 '오냐, 다 던져라. 내가 쫙쫙 흡수해주겠다!'하는 마음가짐과 표정,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쓴다고 착각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이 없으면 매번 나의 바닥을 들켜버리는 회의 시간을 버틸 수가 없다. 드라마에서는 아직 한참 애송이인 내가 갖춰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는 수밖에 없다. 비가 내릴 때까지 바친다는 기우제, 이것은 그저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염원을 담은 단체 몸부림이지... 나 또한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려 팰 준비를 한다. 최선을 다해서 쓰고,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내가 쓴 글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하루 하루 다잡아보고 되돌아보고 스스로 아끼면서 ‘버티는’ 수밖에는 없겠다. 10년은 비볐으니 무명 생활 20년까지는 안 가게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 지금 내가 하느님, 부처님, 알라, 삼신 따질 때가 아니다. 


작년 늦가을에 1차 계약금을 받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동안 진 빚을 다 갚아버렸다. 생각이 짧았다. 기획안만 이렇게 반 년 넘게 끌줄 누가 알았나. 다시 또 생활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지금은 한 e북 업체에서 알바를 하면서 버티고 있다. 심산스쿨에서 제시하는 공식과도 같이 아무런 경제활동 안 하고 오로지 글 쓰는 일에 천착하여 7년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금 더 돌아가자는 생각이다. 좋게 좋게... 


이 작업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설득은, 그냥 쓰는 거, 의견을 듣고 다시 쓰는 거, 그 과정을 무한반복해서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야금야금 만드는 거 말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 김수진 작가 


씨네 21에서 22명의 드라마작가 인터뷰를 했다. 그 중 김수진 작가의 이 말이 기억에 남았다. 이것이 바로 비가 내릴 때까지 끝없이 반복해서 춤을 추는 일이지 않겠나. 

느낌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기획안 통과 9부 능선까지... 내 손에 천사가 또 한 번 내려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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