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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an 11. 2024

[나의 망생일지] 글쓰기 기본기 다지기

 마늘도 다지는데...

여덟 번째의 드라마 기획안을 제출한 뒤 맞는 아침이다. 드라마 작업과 함께 알바로 문화재청에 오래 근무하셨던 분의 에세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인터뷰하러 이른 시간부터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여행가듯 홀가분하다.  (왜 알바를 하는지는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썼다. 드라마 처음 계약한 분들은 나처럼 다른 일 병행하지 않으면 오래 못 버틴다)

사실 나는 아직도 마감일에 꼭 맞추어서 쓰는 그 버릇을 못 버렸다. 사실 마감일이라고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눈치'가 빼꼼해진다. 적어도 언제까지는 글을 넘겨야 한다는 시한을 스스로 정하게 된다. 사실 마감일이 있어도 꼭 그 시간을 맞추고야 만다.  


지식 공동체 '그믐'의 장맥주 씨(장강명 작가님의 닉네임)가 남긴 독서 리스트를 훑어보면 재미있다. 길고 짧은 글로 읽은 책을 모두 촘촘히 기록했다. 글 쓰면서 이 책들 언제 다 읽었나 싶다.  

사실 머릿속에는, 그리고 실제로 메모장에는 두세 개씩 무슨 글 써야지 하고 기획하고 메모를 해놓아도 영 마음이 sns 글을 쓸 짬이 안 날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지난 주 수요일 이후부터 오늘 오전까지, 일주일간이었다. 앉으나 서나 밥 먹으나 술 마시나 계속 쓰고 있는 글 생각에 매몰되어 있어서다. 중간중간 남기고 싶은 생각은 짧게나마 페이스북에 서너 개씩 남기는데, 이곳에는 제대로 각 잡고 밥상차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다보니 허접하게 몇 줄 남기느니 글 쓰기 시작도 안 하게 되는 것이다. 장맥주 씨의 독서록을 보면 '아, 지금 이분 일하고 있구나.' 싶은 메모들이 보인다. 나도 이곳에도 내 단상들, 완벽 방어를 해야 할까.


<일>이라는 제목의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인터뷰집을 소개한 글을 봤다.

그 책에는 “일을 훌륭히 해내면 영혼이 편안해진다”는 중장비 기사가 있고 “사람을 온전히 담을 만큼 큰 직업은 없다”는 편집자도 있다. 그리고 직업을 통해 돈 말고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존경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지, 일에 자부심이 있어야 열정을 가질 수 있지. 대기업 총수도, 새벽에 일어나 쓰레기통부터 비우는 청소부도 모두 자기가 하는 일에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를 받으면 어깨가 올라간다. 나는 '지구의 환경 개선'에 일조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의 선한 경제를 이끌어나간다는 정신으로 우러나와 일할 수 있다면... 나는 다른이들에게 공감을 주고 싶었다. 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내 경험을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안심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아... 이 얼마나 좋은 취지인가! 아아... 황섬 멋있다! 황섬, 너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 행복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그럴 끄어야으야으야으야으야으~ (메아리~)

이럴 때쯤... 만난 것이 바로 드라마였다. 내가  드라마 기획안 기획을 2022년 여름부터 시작하면서 2024년에 접어들기까지 개고생하다보니 별별 감정들로 파도치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한, 기획안 회의하면서 거쳐온 그 미칠듯한 지옥의 시간들. 이건 습작 때 합평만큼 힘들다. 다만 그때는 내가 돈 내고 들어먹는 욕이었고, 지금은 돈 받고 들어먹는 욕이라 더 벼랑 끝으로 느껴진다.


대작가님께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사랑의 이야기는 노벨상을 받았는데, 나의 사랑 이야기나 살아온 이야기는 하찮은 것이 너무 슬펐다. 아니 어떻게 똑같이 24시간, 1년 365일 살아온, 그리고 사랑한 사람의 이야기의 퀄리티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내 이야기는 너무 고집스럽고, 촌스럽고, 바보 같고, 너무 작가, 작가거린다. 나도 그 아마추어 같은 것이 촌스러워 미치겠더라고. 누군가 작가로 추켜 세워줘야 멋있는데, 자기가 작가라고 막 떠들고 다니고 이제야 내가 작가가 된 것 같다고 자각하고 선언하고.... 그게 뭐냐. 안 멋있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놈의 '작가'가 뭐라고. 웃기시네!) 그런데, 회의할 때 딱 그걸 지적 받으니까 너무 힘들었다. 다 들킨 것 같아서. 하나도 안 매력적인 캐릭터가 우뚝 서 있었다. 너무 창피했다.


아마도 몇 개월 전 기획안 반려당하면서 너무 답답해서 남긴 메모인 듯하다. 아주 자괴감 향연이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드는 가장 큰 답답함이 바로 내 글에 다른 이들이 호응을 하지 않을 때일것이다. 쓰면 쓸수록 두고 봐, 내가 더 멋지게 쓰고 말거야! 이 깡으로 부딪치는 치기어린 도전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김연아가 헬스장 가서 근력 운동 안 하고 얼음판에서 고난도 기술이나 예쁜 춤선만 연습하는 것 밖에는 안 된다.

이는 브런치나 얼룩소에 올리는 조금은 다듬어진 글들, 페이스북이나 X에 올리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올리는 글들, 그리고 당연히 내 주업인 기획안이나 대본에 쓰는 글들에도 적용되는 명제다. 명제는 '변함없는 이치'를 말한다.


드라마 준비하면서 모든 이야기는 뿌리부터 단단해야 하는구나 하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 되풀이해서 들었다. 시나리오나 대본이라고, 빈칸 많아 쉽겠다, 재밌겠다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대사 찰지게 만들어내는 것이 너무 좋아서, 나 페이스북 글 쓰면 잘 쓰니까(무척 부끄럽지만, sns 글 잘 쓴다고 생각하고 겁없이 덤볐다. 그러나, 이런 작은 성공 경험들, 좋은 계기는 꼭 필요하다) 시작한 일인데 덤비기 시작한 지 5년 지나 6년이 됐다.

그동안 소설가들의 작품을 잘 안 읽었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천천히 읽으면서 배운 바, 느낀 바가 많다. 여러 문체로 이끌어가는 소설들이 넘쳐난다. 특히 정유정의 소설은 대단했다. 촘촘한 구성, 시원 시원한 속도, 거기다가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정문일침(!)의 대사.... 계속 공부하면서 써야 하는구나. 연료도 안 넣고 차, 그것도 대형 트럭을 움직이려고 했다니 나는 정말 바보 멍충이었다.


요즘 헬스를 다시 시작해서 자꾸 유튜브나 쇼츠에 운동하는 사람들의 동영상이 뜬다. 어제부터 어떤 시껌둥이 같은 근육질 아저씨가 나와서 맨몸운동을 하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많은 분들이 팔도 잘 들지도 못하면서 360도로 돌리고, 제대로 쭈그려 앉지도 못하면서 스쿼트를 하고, 턱걸이 1개도 못하면서 철봉에 무작정 매달린단다. 모든 것이 기본기가 갖추어져있지 않으면 모래 위에 성 쌓기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드라마 쓴다고 나선 이상, 기획안부터 이렇게 수십, 수백 번 넘어지고, 매번 회의때마다 말 못해서 얼굴 벌개지고, 내가 쓰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쩌려고 이러나.

그래서 시작한 것이 새벽에 책 읽기였다. 추천받은 책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어려운 문장도 이거 번역 엉망이라면서 투덜대지 말고 천천히 뜯어 녹이며 읽기로 작정했다. 니체도 에머슨도 세네카도 나심탈레브도 자기들이 우리들한테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겠지 않나. 그렇게 어려운 말 써가며 세상에 뭔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무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읽어나갔다. 하품하면서... 물론 지난 일주일은 책이 눈에 안 들어오고 계속 기획안이 맴돌아서 에라~ 하고 자료수집하던 책 들어서 죽죽 읽어나갔다. 숙독은 아니었고, 발췌독에 가까웠다.

머릿속에 많이 넣어야, 즉 많이 읽어야 밖으로 나오는 것이 많다. 그래야 머리가 비워진다. 새술은 새부대에... '이게 그 이야기였구나'

새벽 독서를 하면서 많은 글을 읽고 이해 안 가도 한 번은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고 하는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글이 잘 써지는지 안 써지는지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정서경 작가가 '알쓸인잡'에 나왔던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일상의 모든 불안을 걷기로 풀던 때였다. 아, 이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말을 차분하게 잘 할까. 어떤 연유로 자기가 쓴 장면의 하나하나를 다 의미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기본기가 잘 다져있을까. 이 사람이랑 나랑 나이차도 한 살 밖에 안 나는데... (꼰대들이 나이 타령하고 자빠졌다. ㅋㅋㅋ) 어디에서 격차가 벌어졌던 것일까. 마냥 속상하고, 질투나고, 죽겠는 거였다. 물론 회의를 앞두고 어김없이 부풀어오르는 불안함은 잦아들지도 않았다.


기본기의 정답은... 나로서는 책 읽기다. 인터넷 상의 모든 글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꿰인 누군가의 일관된 상상, 혹은 사상의 한 테이블을 마주해야 했다. 드라마나 영화 한 장면을 쓰더라도 자료찾기를 많이 해야 한다. 누군가가 식사하는 장면에도 메뉴는 당연하고 식당의 분위기, 심지어 테이블과 의자, 조명과 음향까지 다 조사해봐야 한다. 시대가 80년대라면 그 시절의 옷차림, 학교, 역사, 심지어는 솜틀집 사진이라도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다들 철학, 철학 그러는데, 오십이 넘은 나는 이제야 어려운 말로 가득한 철학책을 질질 끌리면서라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동안 철학 참 모르고 반백 년 버텼다. 몰라도 사는데... 그냥 이제는 공부하고 싶다. 그러면 언젠가는 대사 한 줄 쓰더라도, 엄근진한 철학책을 베끼는 게 아니라, 뭐 하나 묵직한 한 방 나오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해보면서.


- 러브가 무엇이오.

- 그건 왜 묻소.

- 하고 싶어서 그러오. 벼슬보다 좋은 거라 하더이다.

- 생각하기에 따라서. 허나 혼자는 못 하오. 함께 할 상대가 있어야지.

- 그럼 나랑 같이 하지 않겠소?

- ......

- 아녀자라 그러오? 총도 쏘는데.

- 총 쏘는 것보다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

- 꽤 어렵구려.  


<미스터 션샤인>에서 애신과 유진 초이의 대화다. 사랑해. 보다 이 얼마나 뜨겁고 절절한지.

아아아, 김은숙은 대사를 왜 이리 잘 쓴단 말이오. 이 작가님이 과연 얼마나 많은 독서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소만, 나는 이 깊이를 따라잡으려면 할 수 없소. 읽는 수 밖에...


뿐인가. 드라마 <연인> 첫화를 보면 말괄량이 천둥 벌거숭이였던 길채가 바느질을 하다가 꿈에서 빨간 실패를 놓친다. 그 실패를 따라 달려가는 길채. 봄. 여름. 가을. 겨울. 배경은 혹독한 사계절을 지나고, 어느 덧 고운 길채의 치마와 저고리는 낡고 닳는다.

운명의 붉은 실, 사랑하는 두 남녀를 이어준다는 붉은 실이다. 수많은 타래에서도 오직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 닿는 붉은 실. 그윽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던 장현이 쫓아오는 길채를 바라보면 그 실패를 집어든다. 그리고 꿈은 깨는데... 이렇게 빨간 실 하나로 극 전체를 그냥 한 방에 설명해버리는 것이다.


내일도 또 대형트럭을 운전하러 나가야 할 운전사다. 연료 많이 넣고 움직이겠다.

오늘은 대전까지 와서 인터뷰 작업 잘 끝냈다. 여덟 번째 기획안 완성했다고 혼자 두부 두루치기로 자축한다.

대전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대전 성모병원에서 74년 7월 4일에 세상에 잘도 태어났다) 세 살까지 살았던 곳이기도 하며 방학이 되면 한 달씩 외할머니댁으로 원정 와서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각자 쓰고 싶은 글, 지금 쓰는 글들이 있을 것이다. 출판사 투고를 준비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찬 바람 부는 공모전 시즌에 가슴 뛰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브런치나 얼룩소에 올리는 글도 우리 삶의 중요한 루틴인 분도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 X, 쓰레드, 인스타그램, 기타 등등 블로그...

상상도 못할 다양한 글 세상이 우주만큼 펼쳐져 있다. 하루에도 한 주에도 수백 번, 수천 번 슬럼프와 불꽃 튀는 영감을 오가는 우리 모두에게 요정 팅커벨의 빛나는 가루가 뿌려지기를... 팅커벨이 글을 잘 쓰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두루치기 맛있게 먹은 김에 화이팅 외친다.

화이팅.


P.S. - 이번에도 기획안 빠꾸 당하면...

또 써야죠.

하지만, 느낌은 좋은데요.

느낌이 틀렸다면...

또 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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