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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an 14. 2024

'가족' 같은 이야기

가장 이상하고 예측이 불가하고 파악되지 않는 사람들, 가족 

아무리 나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일단 지구에 왔으면 인생의 짐, 숙제들이 하나씩 있다. 나는 그것이 부모다. 부모님이 나에게 돈을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사생활을 압박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미 성인이 된 지도 3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그들과는 독립되어도 한참 독립된 개체이므로 위협받을 일은 없다. 작년에 화제가 된 드라마 <더 글로리>에 보면 주인공 문동은의 엄마는 정말 세상 개차반의 인물로, 지구 끝까지 딸을 쫓아가 괴롭히는 인물로 나온다. 이런 괴물들을 보면, 그에 비해 우리 부모님은 양반이시다. 그러나, 아니기도 하다. 

성희롱의 기준은 느끼는 사람이 희롱이라 여기고 굴욕이라 느끼면 성희롱이다. 그런데, 유독 부모에게만큼은 자식들이 분노나 절망을 느끼는 것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는 더더욱... 반대로 나 또한 '우리 사회'의 일원인지라 뼛속 깊이 이곳에서 부여하는 부모에 대한 기대치와 부모가 가지는 미덕의 높은 기준을 끊임없이 요구했던 것도 같다. '왜 우리 엄마, 아빠만...' 무언으로... 애타게... 기대할 수 없는 것, 잘 알면서도. 

 

얼마 전, 나는 또 부모님에 대한 분노가 글로 튀어나와 막 휘갈겼던 적이 있다. 요지는 부모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겠고, '부모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전혀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고.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그 글은 나만보기로 돌렸다. 예쁜 글, 상냥한 글만 적어내란 법은 없지만 이렇게 험한 글 지나가는 사람들 눈 버리게 읽도록 해봤자 좋을 것 없다. 그래도 마음의 응어리는 어디에 풀지, 막막하기는 했다. 나이 먹으면 나아지겠지, 나이 먹으면 나아지겠지, 아직도 철이 들어 그런 것이니 언젠가는 철이 들면 나아지겠지. 열두 엄마가 너무 미워서 엄마 사진을 콤파스의 뾰족한 침으로 벅벅 그어 찢어버린 지 벌써 40년 됐다. 계속 혼자서 투쟁, 투쟁이다. 


- 이제는 부모 탓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너가 벌써 마흔이 다 됐다. 


한 십 년전, 이 숙제는 꼭 풀고 싶어서 1박 2일 가족 상담을 신청하고 받았을 때 들은 말이다. 아빠가 내게 화를 내며 하신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충고라면 모를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열 받아서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이 말은 차마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 왜 어린 시절 상처는 부모님이 줘놓고, 그 상처도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치료도 안 시켜주면서 아직까지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씀하시나요. 


가운데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를 듣던 상담사 선생님이 부모님에게 이렇게 일갈하셨다. 이것이 오후 세션에 오간 대화였다. 엄마는 '저 여자 몇 살이냐?' 하면서 바로 짐을 싸가지고 나가버리셨다. 아마도 부모님은 천방지축 못난 딸 키우면서 얼마나 힘드셨냐며 위로를 받을 준비를 잔뜩 하고 오셨던 것 같은데(엄마 표정 보면 안다. 잔뜩 위로받은 준비, 일발 장전된 '나 불쌍하지?' 하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이런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화들짝 놀란 것이다. 이런 공격은 딸한테 말고는 살면서 당해본 적이 없는 엄마. 늘 조신한 여성, 존경받는 여성,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여성인 척 가면을 평생 쓰고 살던 엄마에게 충격이었다. 이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상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고, 식구들에게도 일절 금지하고 있다. 




몸은 어른인데 마음은 어린 아이 같을 때를 들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운이 없어 그걸 드러나지 않게 덮어주는 담요같은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면 그 수치심은 오래도록 추위에 떨었을 것이다. 


어떤 분이 내 글을 읽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연락을 주셨다. 한 번도 따로 개인적으로 연락해본 일은 없는 분이지만, 매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서 근황을 늘 파악하고 있고, 어느 정도의 성정과 에너지를 (내 생각으로는) 잘 아는 분이었다. 위의 문장은 그분이 쓰신 글 중 일부다. 페이스북이나 sns에 가장 만연한 전염병은 '난가병'이란다. 이 글을 읽고 나도 '난가?' 하면서도, 얘기 아니면 어떠냐, 눈물이 났다.  

내가 늘 직구로 스트라이크 존에 던져 꽂아넣는 화두, 즉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화두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주제다. 밖으로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가슴으로만 앓으며 꺼내지 못한 말을 용기있게 꺼내니 사람들에게 '나도! 나도!'라는 공감을 아주 많이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에 힘을 얻는다. 그러나... 거기에서 걸음 나아가, 공감 다음은? 

내가 부모님에 대해서 비명을 지르듯 질러놓는 글은 그냥 어린 아이가 배고프면 울고, 추우면 울고, 아프면 우는 정도의 수준이다. 연락을 주신 분의 표현으로는, 그리고 심리 상담 분야에서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 안의 어린아이'가 그대로 튀어나와 내 글좀 읽어달라고, 왜 내 글 안 읽어주냐고 화를 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다. 아직 극복되지 않은 것이다. 


- 그동안 깊은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지요?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어느 누구에게라도 다가가서 이야기 할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 솔직히시간을 쪼개, 쪼개 사는 하루하루인데, 누구와 여유롭게 차 한잔 나누며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놓고는 15분, 20분 잔품 들여 페이스북 포스팅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맞춰 약속을 하고, 만나러 나가고,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게다가 그 소중한 시간에 내 생각과는 거리가 먼 주제를 가지고 목소리 큰 사람이 계속 늘어놓으면 정말 지친다. 그러느니 혼자 간단히 글을 남기고 마는 것이다.

브런치나 얼룩소 글은 쓰고 다듬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주제도 나름대로 엄선한다. 2-3일 정도 생각을 묵히고, 자료를 찾은 후 쓰는 편인데, 반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그냥 내 의식의 흐름 고대로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급발진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휘휘~ 속도 위반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쌀을 찌푸리게도 할 것이다. 당연히 따봉 장사도 안 된다. 그럼 또 시무룩해지고. 이 싸이클이 간혹 반복되면서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가끔씩 폭탄처럼 터지는 내 응어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이유도 명확하게 알았다. 사람들은 '규범'에 어긋나는 글을 불편해한다. 아무리 어머니, 아버지가 싫더라도 그들의 장례식에서 부조금 받아서 빚 갚겠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듯. 어떤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지구상에서 식인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듯. 간단히 말하면 '선 넘지 말자'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이 지혜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지난 금요일 저녁인데, 일요일 오후인 지금 이 시간까지 계속 '지혜'에 대해서 곱씹어보고 있다. 그리고, 조금은 창피하고, 다른 마음으로는 좀 늦었어도 이제서야 지혜를 의식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그동안 수십 년을 부모님 미워하면서 살아오는 내마음도 다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그 냉기 도는 심장도 따뜻하게 스스로 돌봐주고 싶고, 불쌍하고... 복잡했다. 주말 내내... 

내 심장에 부글부글 끓는 문장은 천천히 소설로 풀어내어서 나중에 드라마로 다시 각색하든, 영화 시나리오로 풀든 해야겠다는 과제도 하나 더 얻어간다. 이것은 가슴 뛰는 숙제다. 

또 하나의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썼다. <한 여자>를 통해 어머니의 삶을 썼다. 둘 다 사후에 쓴 글이다. 조금 더 객관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필요한 단어'만 사용하는 문장으로 담백한 어조는 그녀의 서술에 힘을 더 실었다. 


그나마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대담집 <뒤라스의 말> 에서는 조금 내가 위안을 얻을 만한 구절이 나온다. 

그녀야말로 '애증의 모녀 관계'로 유명한 작가이니까.  


토레: 어머니는 어떤 여성이었나요?

뒤라스: 극성스럽고 미친 사람이었죠. 오직 엄마들만이 그럴 줄 아는 것처럼. 한 인간의 존재 속에서 엄마란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결단코, 가장 이상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파악되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우리 엄마는 건장하고, 강한 여자였어요. 어쨌든 우리가 놓였던 그 음울한 삶의 국면으로부터 언제든 우리를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죠. 

 

그러나, 뒤라스의 어머니는 미친 여자라고 묘사는 했지만, '자식을 보호할 준비는 되어있는 사람'이라고 회고한다. 자식을 보호한다는 의미는 일상의 위험, 배고픔, 질병 등을 자식들에게서 멀어지도록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기도 하고, 자식들의 미래와 같은 무형적인 자산을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뒤라스: 엄마는 내가 너무 유식해지는 걸 원치 않았고, 그 부분은 맞아요. 엄마는 지식인들에게 어떤 근원적인 공포가 있었어요. 자신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공포가요. 살면서 엄마 손에 책이 들려 있는 걸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어요. 바로 그 때문에, 또한 다른 수많은 이유들 때문에 난 집을 영원히 떠나기로 결심했죠.  


내가 부모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뒤라스의 말에 조금은 섞여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자기들이 우월하기를 바랬다. 신기하게도 부부가 그 면이 일치했다. 그래서 그들보다 학벌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월등하게 우월한 내 동생의 포지션은 '우리가 얘를 이렇게 영재로 잘 길렀다'는 것으로 잡았다. 나는 별로 내세울만한 재주가 없어서 그동안 빛을 받지는 못했지만, 몇 년 전부터 새로운 포지션이 생기기는 했다. '내 유전자를 받아서 얘가 글을 쓴다(아빠)', '내가 얘 국민학교 1-2학년 때 그렇게 붙잡고 일기 불러주고 글짓기 연습을 시켰다. 그 이유다(엄마)'

........... 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오는 것이 위에 언급한 작가들은 닥치고 월클, '아니 에르노'에 '마르그리트 뒤라스'다. 그리고, 글을 고르다 보니 우연히 두 사람 모두 프랑스인이기도 하고. 먹골역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짓고 있는 황섬은 조금만 더 사고력을 기르고, 마음의 응어리를 푹 삶아 잘 풀어낸 뒤 나아중에 어머니를 논하고, 아버지를 평하도록 하자. 



- 나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일부러 그들의 먹이가 되어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그곳에서만 마음을 털어내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 이런 숙제 하나씩 다 있어요. 정말로... 


아직도 이 글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왜 부모님 욕을 하는지 모르겠는 분, 이런 글마저도 부모님이 읽으시면 섭섭해 하실 것 같아서 마음이 조마조마한 분, 혹시라도 '이 사람 부모를 이렇게 얘기하다니 못 쓰겠네.' 속으로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모두 로또 이상의 행운아들임을 알아주시기를.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사랑 그게 뭔지 아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 태어나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불안할 지언정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인생의 숙제, 지혜로이 잘 풀어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기도하며 키보드를 눌러본다. 음식도, 글도, 그림도 모든 짓는 사람의 마음의 파장이 깃들어서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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