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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05. 2024

[나의 망생일지] 좀 창피한 내 취미를 공개합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우리 아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조그마한 잡지를 좋아하셨다. 특히 그중에서 <웃음은 명약>이라는 코너를 즐기셔서 그 내용을 다 외우고 사람들에게 신나게 읊어주셨다. 그런데, 어린 나에게는 그 영어 번역체의 유모아가 너무 안 웃기고, 억지스러웠다. 그중 하나 기억나는 '언어 유희형' 개그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글의 제목이다.  


NOW, HERE. 

지금 바로 여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가장 유명한 넘버 '지금 이 순간'도 떠오르게 하는 바로 두 단어. NOW, HERE. 

아빠는 나에게 검지 손가락을 펴고 '사람은 지금, 여기에 살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어 물으셨다. 

"그런데 이 두 단어를 합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 NOWHERE다. 하하하하!"

그리고 두 손으로 손뼉을 털어내듯 툭툭 치신다. 

"아무 데도 없대. 하하하하!!!" 

아빠는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시는데, 나는 어느 지점에서 웃어야 할지 몰랐지만 그래도 같이 따라 웃었다. 양질의 유모아는 아니었어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다. 


NOW + HERE = NOWHERE 


그리고, 여전히 현재를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아무 데도 없다는, 0도 아닌 '무'의 경지 또한 어찌 이르는 지도 잘 모르지만 이 공식만은 내게 선연하게 남아있다. 



심리 상담 3회 차. 

선생님은 내가 피해의식으로 대변되는 '과거'와 완벽주의로 똘똘 뭉친 '미래'를 점프하면서 살고 있다고 알려주셨다. 모두 괴로운 영역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으로든 물질로든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서 지금 '이 모냥 이 꼴'이 된 것이고...

여기까지는 과거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간절하게 밝은 미래를 바라고, 기필코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의 영역이다.  


과거 - 미래 - 과거 - 미래 - 과거 - 미래 

어울렁 더울렁... 물에 떠다니는 풀떼기 같이 불안하게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현재'에 뿌리내려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지금 책을 읽고 있다면, 독서의 시간을 마음껏 누려야 한다. 여행을 갔다면 그저 여행에 푹 빠져들어 즐기면 된다. 루틴은 잠시 접어두고, 인생의 기분 좋은 변주를 누리면 그만이다. 

그동안의 나는 늘 어딘가에 매여있고, 불안하고, 뭔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강했다. 여행을 가도 노트북은 기본으로 가져가야 했고, 여행 일정이 어떻든 책도 서너 권은 가져갔다. 숙소에 가서도 먼저 와이파이를 체크하고, 넓은 테이블이 있는 주변 공간을 찾아 헤맸다. 이렇게 해야 성공하는 건 줄 알고... 현재의 시간을 희생하고, 여행을 가도, 놀러 가도 할 일은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일을 해내는 책임감 있는 내가 멋있는 알고...  

아니었다. 

남은 것은 가족들의 성화(엄마는 왜 일찍 일어나요? 놀러 왔는데도 왜 그래요? 엄마랑 놀러 가면 왜 가는지 모르겠어, 집에 있는 거랑 똑같으면서 등등...)와 발은 다른 땅을 밟고 있으되 마음은 콩밭인 유체이탈의 나일뿐. 


지금부터 나의 부끄럽고 애송이 같은 취미생활을 하나 알려드리려 한다. 웃지 마시길. 물론 선생님께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내 취미는... 

밤에 다른 식구들 다 잠들면 불 꺼놓고, 맥주나 소주 한 병 옆에 놓고 유튜브 동영상을 켠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아! 이 부분이 너무나 부끄럽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백상예술대상이나 청룡영화제 등등 각종 시상식의 각본상과 연기대상 등의 소감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다. 눈물이 어찌나 흘러나오는지 휴지 가지고는 택도 없다. 세수수건을 허벅지에 깔고 보는 것은 기본이다. 울면 바로 집어 들어 벅벅 닦게... 

본 것 또 본다. 

특히 김혜자 선생님의 '눈이 부시게' 연기 대상이나 박해영 작가의 '하면 다 돼요' 수상 소감은 진짜 수십 번 본 것 같다. 그리고 백상예술대상이던가, 김은숙 작가가 호명이 되고 우아한 흰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를 입은 그녀가 벌떡 일어섰을 때 주변에 함께 앉아 있던 배우들이 함께 기뻐하며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아, 또 눈물이 나려고 그런다. (히잉~ 창피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 여주인공의 취미도 같은 것으로 줬었다. 왜 과거형이냐면 지금은 이 취미를 지웠기 때문이다. 


"선생님, 저 너무 미래에 가 있죠. 너무 애송이, 초보 같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뜨면서 말씀하셨다. 

그 장면 꼭, 꼬옥~ 어디에라도 집어넣어 달라고. 

꿈을 가지는 것과 강박적인 미래에 사는 것과는 다르다고 덧붙이면서.  


나의 간절함은 꿈일까 강박일까. 

"다 잘 될 거야. 다 잘 되려고 하나 봐요."

이런 다짐들이 사실 지금까지 나를 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넌 잘 될 거야.'라고 응원해 준 지도 한 넉넉잡고 십 년 됐다. 미안해 죽겠다. 도대체 '잘 되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계속 응원만 받으니 말이다. 

유명해져서 유퀴즈에 나가는 것?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에 쏙 드는 그림 같은 집을 사는 것? 통장잔고 생각 안 하고 거침없이 친구들에게 호텔에서 점심 쏘는 것?

선생님께서는 인생은 '결코' 그렇게 흘러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너무 핑크빛 미래에 사로잡혀 살면 안 된다고. 그러다 보면 현재를 놓친다고. 

그렇게 꿈꾸던 블링블링한 미래가 오지 않는다 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것,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날 줄 아는 것이 바로 건강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달콤한 미래는 '결코' 오지 않음을 이미 십 년 넘게 건너오면서 알지 않았나. 그러나, 십 년 전보다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이게 성공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미 성공한 나는, 오늘내일 신나게 막바지 기획안 작업을 하고 감독님에게 원고를 넘길 것이다. 



머리 식힐 때 보기 딱 좋은 유튜브 채널이 성시경의 먹텐이다. 멍하게 성시경이 술 한잔 곁들여 맛있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해도 뇌가 쿨링 되는 것만 같다. 와, 여기 어디냐... 술 참 맛있게 먹네... 게다가 먹으면서 맛을 설명하는 데에는 성발라가 국내 최고다. 그 어떤 셰프도 먹방러들도 이리도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며 맛을 즐기지 못하는데...  

그런데, 천하의 성식이형이!!!! 금주를 단행했다.  

그것도 한 달이 넘게... 이유는 연말의 콘서트였다. 본업이 가수이니 몸도 몸이지만 목 상태는 최상으로 보존해서 최고의 음성을 팬들에게 선사해야 하는 것은 큰돈 들여 콘서트를 찾는 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기본일 터였다. 그런데, 그 기본을 너무나 성실하게 지켜냈다. 심지어 먹텐 동영상 촬영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금주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내가 하는 작업에 얼마나 경건한 자세를 지니고 있는가. 안 그래도 미래에 대한 성공 강박 심한 내가  또 한 겹의 강박까지는 두르지 않아도 어느 정도까지 지켜야 할 선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성식이 형이 금주를 하는데!!! 

그것이 나는 하루하루 책 읽기다. 우리들 일상에서 책 읽기는 기본인 것 같지만, 의외로 밀도 있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독서'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자료 수집차 '발췌초록'해서 읽는 것은 진짜 천재적이다. 웬만한 책 한두 권은 하루에 다 내용 파악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숙독의 시간이 턱 없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니 어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생각이 깊어질 리가 없었다. 깊지 않은 생각으로 그저 겉핥기의 글쓰기로 선방하면 상대는 그것이 클라이언트가 되든, 독자가 되든, 제작사가 되든 모두 알아버린다. 3일째 연습 빼먹은 음악가와 같다고나 할까. 이것은 내가 소설을 쓰든, 드라마를 쓰든, 어떠한 일을 하든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

- 레너드 번스타인 


한동안 영화 <헤어질 결심>을 쓴 정서경 작가를 탐구해 본 적이 있다. 어떻게 해서 그녀는 세계적인 각본가의 자리에 올라섰을까 궁금했다.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주어진 하루 24시간도 똑같은데 지금 저렇게 오른 과정은 어땠는지 짚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같은 길을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과연 박찬욱이라는 감독을 잘 만나서 운 좋게 오른 것인가. 아니면 그녀 각고의 노력이 있었는가. 원래 글빨이 좋았었는가. 


예전에 정서경과 같은 학교를 나온 작가인 내 친구랑 술을 마시다가 내가 취해서 이런 뻘소리를 한 적이 있다. 


"나, 각 잡고 쓰면 정서경보다 더 잘 쓸 수 있어."

"아니, 정서경이 더 잘 써."


단칼에 베어버린 친구야. 내가 미쳤었나 보다. 

그리고, 정서경은 원래 잘 쓰는 친구였나 보다. 


내가 찾은 해답은 그녀의 철학이었다. 철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한예종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정서경 작가가 '알쓸신잡'에 나와서 보여준 차분한 말의 논리와 생각의 깊이는 진짜 감명 깊었다. 참 닮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분하게 알아듣기 쉽도록 자기의 이야기에 근거를 남겨주고, 더 나아가 생각을 확장시키려면 (아아, 여기까지만 꼰대짓할게요...) 아무리 이것저것 해 봐도, 해 보니까, 독서 밖에 없었다. 그리고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거 번역 문제 아니야?라고까지 생각이 드는 어려운 철학서에 천착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야기는 지어놨는데, 감도 오고 필도 딱 오는데, 막상 회의나 피칭 가면 이게 잘 설명이 안 되어 미치겠는 지망생 여러분들, 작가 여러분들. 

철학책을 헬스장 가서 운동하듯이 억지로 꼭 읽어보자. 함께 읽자. 

재미없어도 힘겹게 호흡조절하면서 반복해서 읽어보자. 나라고 지금 독서 근육이 이두박, 삼두박 쫙쫙 갈라지게 붙은 것도 아니고 그저 애송이 수준이지만 일단 책 드는 것과 안 드는 것의 차이가 크다. 


어디에서 효용을 가장 크게 느끼냐 하면... 회의 때다.  

묵직한 한 방으로 적들을 전멸시킬 것 같은 무기가 하나 양손에 들린 것 같다.  내가 글에 대한 설계도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느낌이다. 

그러므로 '이게 무슨 얘기예요?', '이 캐릭터는 이렇게 가요?'라는 두루뭉술한 질문, 너무 많이 들어서 나중에는 화까지 나는 이런 질문들에 논리가 생긴다. 

지금 이 논리, 정확한 것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어도 일단 철학책에서 읽었던 것들 대충 둘러대도 된다. '이야기를 잘 모르겠어요. 뭐예요?'라는 나른한 질문에 어떤 구절이라도 갖다 대어도 다 말이 되는 것 같아 보이는 신비가 펼쳐진다! 

[적어도 기껏 고생해서 글은 다 써서 갖다 줘놓고, 말빨로 발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철학의 진짜 내공이 쌓이는 것을 목표로 하자. 내공이 생기려면 적어도 수년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전엔 어쩌겠나. 이렇게 일단 아무 구절이라도 정성껏 따 와서 내 이야기와 논리 만들어내는 거지. ㅋㅋㅋ


성시경의 금주를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다. 

마지막으로 콘서트를 앞둔 성시경의 경건한 마음가짐처럼 글 작업하면서 또 하나 실천할 것은 건강이다. 

술은 와인이든 소주든 지금보다 반 병 정도 줄이면 딱 좋을 것이고(나의 총주량은 밝히지 않겠다;;;), 운동은 지금처럼 일주일에 1-2회 정도 고강도로 실시하고, 주말 걷기를 1-2만 보 정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중에 그렇게 바라던 각본상 타고는 아파서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이 글은... 나중에 성지글이 됩니다... 


마음속으로 오늘도 꿈 꾸며 망생이의 하루 작업 일지를 마친다. 


 



"서완아. 가능성이 사람 미치게 한다."

-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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