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인 여성, 몸의 역사.
한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의 용기 있는 책을 읽었다.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바로 그 스토리였다. 저자의 어머니 또한 큰 용기를 내주셨고, 기본적으로 이 모녀는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뭐랄까, 물리적인 구도가 일단 갖춰진 사이였다.
섭식장애를 안고 사는 삶... 그런데, 이 책에서 내가 기다렸던 내용과 같은 것 말고 너무나 다양한 삶이 있다. 왜 섭식장애인들은 다 우울해야 할까. 깨발랄한 섭식장애인들도 있다. 그냥 하루에 몇 번씩 잠깐 배부른 느낌 들어서 너무너무 불쾌하면 토하고 다시 기분 되찾고 산다. 물론 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다수의 사람들이 입원은 안 한다. 못 하지. 그리고 절대 이야기도 안 한다. 가엾게도 이들의 부모님들은 섭식장애가 뭔지도 모른다. 박채영 씨의 엄마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화해하고, 지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자식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알게 된 부모들은 식구들이 다 모이면 나서서 얘는 먹고 토한다고 놀리기도 한다. 끔찍하지.
여자 친척들, 고모나 이모들은 '넌 또 얼마나 날씬해지고 싶어서 그러냐' 라며 나무라기나 한다. 섭식장애는 배때지가 불러서 생기는, 지금 외모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된장들이나 걸리는 귀족병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예상한 공식 그대로 딱딱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펐다 세상은 이렇게 '나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나입니다. 그냥 안고 가겠습니다.' 류의 딱 떨어지는 공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자가 지금 섭식장애를 이겨내고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좋으련만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어떻게 보면 역경을 이겨낸 드라마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장 계약서와도 같은...
지금까지 세상의 역경을 이겨낸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였던 사람 손들어 보자. 얼마 없다. 너무 없다. 나도 아니다. 늘 언젠가는 대단한 일을 할 거라는 착각을 하며 살뿐.
수많은 '숨은' 섭식장애인들은 그냥 불편하게, 예상치도 못하게, 남들에게 말도 못 하고, 연대? 따위 없이, 어글리 하게, 맨날 토하다 눈물 흘리며(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토하다가 피가 쏠려 압력에 의해 밀려 나오는 눈물... 웃프게도 말이다) 살아가야 하는 거다. 그러다 늙겠지. 나중에는 파파할머니 할아버지 되면 토하다가 혈압 때문에 터져서 죽을 수도...
이 책을 읽고 정말 용기 내어 글 쓴 분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같은 섭식장애에도 더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엄마와 내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지브이에서 한 관객이 엄마에게 질문을 해왔다.
"딸에게 무엇을 용서받고 싶으세요?"
- 『이것도 제 삶입니다』p153
사실 이 관객의 질문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감히 엄마에게 저런 질문을 던진다고? 딸에게 용서를 '받는다'고?
용서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앞서는 것 아닌가. 이어 부러움이 흘러넘쳤다. 그리고 빌어먹을 노안 때문에 쓰고 있는 안경의 알을 푹 적시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어떻게 엄마가 대중들 앞에 딸에게 '잘못을 했다'며 '용서'를 받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거지? 이런 엄마도 다 있다고?
나는 요즈음 내적으로 찬란한 투쟁 중이다. 그냥 내가 '찬란한'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었다. 이런 내가 대견해서. 그리고 앞으로는 아무래도 엄마와 나의 관계가 내 반 세기의 삶 어떤 때보다도 밝을 것 같아서.
엄마, 아빠는 바뀌지 않는다. 나도 지금 털레 털레 늙어가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가 바뀌는 것이 낫다.
나는 시방, 이 결심을 하고 오랜 세월 그렇게도 이를 갈며 징그럽게 뿌리 내려왔던 부모에게, 특히 엄마에게 '용서받을 생각', '용서받고 싶은 생각'들을 지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애써, 애써, 마음을 고쳐먹어 가면서...
"딸 앞에서 이걸 말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중략)
"저는…… 어릴 때부터 전형적인 가부장제와 숱한 성폭력 속에서 살아왔어요. 제가 한국의 가부장제와 남성들의 폭력, 여성이 처한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대신 딸에게 무조건 조심하라고만 했기 때문에 딸이 아프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중화장실 조심해라, 밤길 조심해라, 찻길 조심해라. 조심해라. 조심해라. 제가 조금 더 당당하게 맞서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딸에게 조심하라는 말 대신 맞서라고 말했다면 딸이 아프지 않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깊이 사과하고 딸에게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도 제 삶입니다』p154
세상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엄마도 다 있구나. 그렇구나.
지금 나에게 꽉 찬 마음, 지난 기억들을 그대로 다 글로 뱉어놓으면 우리 엄마를 나무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냥 꿀꺽 삼키려고 한다. 그래도 아마 내 머릿속에는 오래오래 잘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마음...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인 채영 씨와 엄마가 함께 소리 내어 읽었던 '여신의 십계명', 이곳에 남겨본다.
1. 여신은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
2. 여신은 가장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한다.
3.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
4. 여신은 한과 살을 푼다.
5. 여신은 금기를 깬다.
6. 여신은 신나게 논다.
7. 여신은 제멋대로 산다.
8. 여신은 과감하게 살려내고, 정의롭게 살림한다.
9. 여신은 기도하고 명상한다.
10. 여신은 지구, 그리고 우주와 연애한다.
여신인 나 황섬은 지구와 우주와 연애하겠다.
이 책은 엄마와 딸의, 함께 살아가고 꽃 피우는 '몸의 기록'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