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진 훌륭한 단문을 읽을 때의 맛
만두는 물론이고, 오뎅, 김밥 등 분식류를 몹시 좋아한다. 음식 중에 '제일 좋아한다'라고 까지 이야기해도 사실 거짓말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이상하게 김에 밥 깔고 기껏 신경 써봤자 당근 채친 것 한 두 줄, 시금치 한 줄, 신 단무지 하나 들어가서 밥 노랗게 물든 '꼬마김밥'을 최고로 좋아한다. 그게 뭐 맛있다고...
몇 개월 전부터 지하철 역사에 김밥, 떡, 과일, 레토르트 포장 국이나 밀키트를 파는 가게가 들어섰다. 오며 가며 놓친 아쉬운 아이템들만 싹 모아 파는 터라 인기가 좋다. 가격대도 '내가 뭐 홀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싶을 정도로 요즘 물가치고 착하디 착하다. 나는 그곳을 지나기만 하면 꼭 '꼬마김밥'을 산다. 이상하게 이 꼬마 요물이 너무 좋은 것이다. 손에 묻는 (정체 모를) 참기름과 깨 한두 알마저도...
굳이 내가 어디다가 나는 '꼬마김밥'을 좋아하오!'라고 떠들지는 않았는데, 세상에... 나랑 똑같이 그 심심한 김밥을 좋아하는 분이 계셨다. 뭐 꼬마김밥 취향 하나 가지고 뭐 그리 놀라나 싶지만, 깜짝 놀랐다. 이분은 한 번 먹으면 계속 주워 먹게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진 훌륭한 단문을 읽을 때의 맛'이라고 풀이하셨다. 과연... 그 담백, 간단한 재료와 맛은 단문의 맛이다. 화려한 복문, 줄줄이 이어져 꽉 짜인 '네모난 문단'과는 다른 맛이다.
'꼬마김밥'을 좋아하는 악담 님은 단순 김밥 이야기로만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같은 김밥 러버로서 너무나 신이 난 나머지 그냥 단순한 김밥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
'꼬마김밥'을 좋아하는 이유를 (유치하게) 배틀하듯 또 들어보자면, 다른 분식 선수들과 너무나 융화가 잘 되는 착한 음식이어서 그렇다. 이 친구랑도 잘 놀고 저 친구랑도 잘 어울리는, 무난하고 말 없는 친구 같은 느낌.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김밥과 오뎅을 주로 시켜 먹는데, "김밥 위에 떡볶이 국물 좀 얹어 줄까요?"라고 물어봐주시는 분이 계시다. 당연히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국물에 이렇게 떡까지 딸려 올라오면 이날은 횡재한 것이다. 꼬마 김밥에 오뎅에 매콤한 떡볶이 국물이라니! 실제로 이 접시를 받아 들고 "어머나~"하고 대놓고 감탄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던 기억이 난다.
이리도 김밥을 좋아하면서, 이상하게 집에서는 직접 만들어 먹게 되지 않는 진입장벽 높은 음식이 또 김밥이다. 속재료 준비하는 데에 공이 많이 들어서 '그냥 김밥은 사 먹는 것이 돈 버는 것'이라며 일축해 버리는, '간단하게 국수나 해 먹을까?' 류의 제안을 눈치 없이, 서슴없이 하시는 분들(안 만들어 보고 쉽게 판단을 내려 버리심)의 말씀에 일단 기대어 안 만들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 이걸 다 하냐. 그냥 사 먹자.'
'꼬마김밥'은 그저 당근 채쳐서 기름에 볶고, 시금치 살짝 데쳐서 간장으로 간하면 끝이다. (솔직히 이 문장을 쓰면서 아아, 적지 않은 시간이 들겠다는 생각에 슬슬 전의가 사라지고 있다만...) 몇 달 전에 김밥 한 번 싸보겠다고 김밥 김 200장짜리를 사두었다. 아직 뜯지도 않은 김, 오늘 저녁쯤엔 한번 열어봐야겠다.
(최초로 이 글을 써둔 것이 3월 31일. 그리고 5월 20일 현재까지 아직 김 봉지를 뜯지도 않았다......)
아 참, 그리고 또 하나의 꿀팁.
이 꼬마 김밥 위에 와사비를 찍어서 톡 얹고, 고등어 회나 전갱이 회를 초밥 만들듯이 얹어 먹으면 꿀맛이다. 꼭 실천해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