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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Apr 03. 2024

연근조림

어른들의 반찬 

우리 엄마는 전에도 몇 번씩 이야기했었지만, 요리 솜씨가 영 없다. 워낙 한 끼니를 대해도 '뭘 맛있게 먹어볼까' 하는 생각보다도 그저 배가 고플 때 배나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어린아이 두 명을 키우면서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떡볶이를 사주거나 만들어준 적이 없다! 

한 4-5년 전, 전국으로 만두를 먹으러 다니며 '만두 에세이'를 쓰던 때였다. 어린 시절 살던 우리 집 바로 근처에, 정말 지근거리도 그렇게 가까울 순 없는 곳에 꽤 유명하고 오래된 만두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어린애들 입맛은 보통 엄마가 해주는 대로 따라가기 마련인데, 우리 엄마가 영 먹을 것에 관심이 없으시다 보니,  그렇게 유명한 만두집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보통 아들들은 큰 까탈 없이 엄마나 아빠가 만들어주는 음식, 걱실걱실 잘 받아먹는데 딸이었던 나는 엄마의 상차림에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엄마 밥상에 대한 충조평판이 매일 이어졌다. 왜 김치찌개에 국물을 내고 나서 멸치를 빼지 않느냐. 도시락 반찬에 왜 나는 소시지를 안 넣어주느냐. 콩나물국이었던 어제저녁 국이 왜 오늘은 김치콩나물국으로 어떻게 변신한 거냐. 오징어(진미채)가 왜 이렇게 딱딱한 거냐 등등...

사실 내 말이야 맞긴 맞았지만, 사사건건 얄밉게 잡아내면 안 그래도 음식에 취미 없는 양반이 더더욱 안 해주고 싶으셨을 터. "그럼 니가 해 먹어!"란 반격도 심심치 않게 받았다. 


어린 시절에는 급식이란 것이 없고, 다들 집에서 도시락을 싸왔다. 지금도 4교시 종 치고 나면 교실 가득 퍼지는 50여 개 도시락의 반찬 냄새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후각의 기억 이렇게 명확히 남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예민했던 십 대, 우리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은 너무 초라해서(?) 나중에는 도시락 뚜껑을 여는 것이 겁이 날 정도였다. 아니, 겁이 날 필요도 없었던 것이 엄마의 반찬에는 늘 '우엉조림'이나 '연근조림'이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두가지 뿌리 채소를 간장에 조려서 도시락통에 넣어주셨는데, 간장물이 늘 흰밥에 배어서 밥이 늘 까매졌었다. 게다가 식당에 가서 먹어보면 연근 조림들이 반들반들 윤기가 나던데, 엄마 연근은 윤기도 안 나고 검은깨는커녕 깨소금도 뿌려져있지 않았다. 그냥 '연. 근.' 끝. 

삼시세끼 이 반찬을 먹다 보니 다른 좋은 곳에 가서 한정식 한상 차림을 먹을 때도 연근, 우엉 반찬이 나오면 거들떠도 안 봤다.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다기보다 관심조차 없었다. 연근조림, 아이들이 좋아하기에는 너무나 지극한 '어른 반찬' 아닌가! 


나중에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식구들 밥을 만들어 주면서 그제야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식구들 입맛은 어쩔 수 없이 요리를 주로 하는 사람의 입맛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 같이 엄마의 일방적인 요리 방식, 즉 딸의 요청에는 귀를 막은 채 본인이 늘 하던 음식만을 마련하던 것에 크게 반기를 들던 사람도 수십 년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만 만들고 있던 것이다. 요즘은 그나마 점심이라도 급식을 먹어서 여러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나 있으니 다행이었다. 

하루는 티브이에서 연예인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오징어 볶음'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기에 딸이랑 멍하니 함께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얘를 낳고 17-8년을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오징어볶음을 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흔한 음식을... 낙지볶음은 몇 번 해준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껍질 까고 손질하는 것 복잡해서 잘 안 해줬었다. 


"어머나, 내가 너한테 오징어볶음을 한 번도 안 해줬네."

"그래?"

"너 오징어볶음 먹어봤어?"

"아, 엄마~"


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오징어는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해산물이다. 이상하게 낙지는 좋아하면서 오징어는 딱히... 질감이 뭔가 탁하고 질길 것 같은 느낌에 별로 안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자진해서 오늘 저녁 우리 집 반찬으로 오징어볶음을 먹어야겠다며 신나게 만들어낼 리가 만무. 심지어는 마른오징어채도 살면서 딱 한 번 무쳐봤다. 

우습지만, 이 생각이 들고나서야 엄마가 왜 그렇게 연근조림, 우엉조림을 끊임없이 졸여댔는지 알 것 같은 것이다. 엄마는 연근조림과 우엉조림을 좋아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쌌기 때문에 부담 없이 얼마든지 만들었을 것이다. 뿐인가. 한 번 잔뜩 만들어 두면 두고두고, 한 열흘은 먹을 수 있었다. 


며칠 전, 한살림에 갔는데 연근이 눈에 띄었다. 아니, 그전에도 늘 밥을 검게 물들였던 엄마표 연근조림을 떠올리며 눈에는 띄었지만 '뭘 연근을 또 졸여 먹냐. 싶어서 굳이 집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은 집어서 장바구니에 넣어왔다. 그리고, 아삭한 연근 생각이 삼삼하게 났기 때문이다. 물엿을 잔뜩 묻히고, 검은깨를 뿌려서 반짝반짝 예쁜 연근 말고 덜 달고, 윤기는 없지만, 적당하게 삶아져서 아작, 소리 나는 엄마 연근 말이다. 

내가 살면서 연근을 다 졸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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