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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Apr 23. 2024

호구 잡힌 날의 오후

하수구 악취 제거로 고민하시는 분들께...

딸네 집 화장실에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서 한두 달 전인가, 사람을 불렀다. 커다란 기계를 들고 나타난 젊은 남자 두 명. 한 명이 대장이고, 나머지 한 명은 누가 봐도 쫄이었다. 

부엌과 화장실이 연결이 되어 있다면서 부엌 싱크대를 잠그고 락스를 한두 통 때려 붓고 확 내려보내라나. 그 설명을 계속 반복하며 본인이 회사 에이스라고, 내가 일 제일 잘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꿀팁 알려주는 거라고, 이런 거 알려주면 솔직히 우리 같은 사람들 다 굶어 죽는다고 그러면서 나중에는 긴 호스로 빨아들인 검은 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다 배관에 낀 물때들이라며...

한 40-50분 작업 낑낑대며 하고는 작업비로 30만 원을 청구했다. 


"어머, 속 시원해라!"


나는 누가 뭐 고쳐주고 가면 쓸데없이 그렇게 감탄을 한 번은 해준다.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힘 들여서 한 일인데, 기분이라도 좋으라고. (이제는 나이 들어서야 아주 아주 가끔 이런 쓸데없는 말들이 독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는 됐다만... 즉, 이런 스위트한 말도 상대를 보고 발사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분들 예상대로 다시 악취가 풍겨나기 시작했다. 딸이 지난번 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단다. 작년보다 더 심한 것 같냐고 물었더니 지금 정도를 가늠할 수가 없다고... 악취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면 냄새라도 막자 싶어 검색하니 트랩이란 것이 있었다. 다시 사람을 불렀다. 남자분 한 사람이 왔다. 


"아니, 사모님, 지난번 업체 부르셨다면서요. 트랩은 기본인데, 그 얘기 못 들으셨어요?"

"아니, 사모님, 내시경이라고 해서 이 안에 배관 상태 보여드려야 하는데, 보셨어요?"


트랩은 내가 검색하다가 알았고, 내시경은 사람 몸에 집어넣는 거 아니었나? 나는 이쯤에서 바쁜 일이 있어 집으로 퇴장. 딸이 지켜보고 있었다. 우두두두두 굉음을 내며 바닥을 다 뜯고 쿵짝쿵작하더니... 조금 있다가 전화가 왔다. 정말 기가 막힌 목소리로 재차 묻는다. 


"아니, 사모님, 30만 원 주고 청소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청소 하나도 안 되어 있어요. 뭐 하고 간 거예요, 그 사람들? 지금 여기 새까매요. 벌레도 엄청 기어 다니고, 머리카락도..... "


으아아아아!!!! 사진을 보내왔는데, 정말 기가 막히다. 


안 그래도 그 청년 두 명이 나한테 계속 옆 호실도 싸악 돌아가면서 층층이 배관 청소하셔야 완전하게 냄새가 빠질 거라고 계속 푸시를 해서 웃으며 "제가 여기 주인이 아니에요."라고 했더니 아, 자기네들은 내가 여기 건물주인 줄 알았다고 하는 꼬라지가 이상하다, 둘이 하나 같이 뭔가 모자라다 했었는데... 


일하는 아저씨는 지금 그쪽 명함 있으시냐며, 이거 항의하시라고 한다. 딸도 엄마가 말 못 하겠으면 내가 대차게 대신 말해주겠다고 씩씩댄다. 그리고, 내게 70만 원을 받아갔다. 악취 때문에 100만 원을 쓴 셈이다. 어쩌면 나는 따불로 호구 잡힌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청년 두 명 와서 4-50분 동안 낑낑대는 척 연기한 값은 제외하고는 20만 원은 돌려받고 싶지만... 내가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들이 방바닥에 엎드려 메소드급 '일 하는 연기'를 할 때 내가 그자의 등짝에 광활하게 펼쳐진 용 한 마리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겨우 1-20만 원으로 칼빵 맞고 싶지는 않다. 아니, 칼빵의 계기를 조금이라도 만들고 싶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딸의 거주지를 알고 있지 않은가! 


결론. 

딸네 집 악취는 싸악 잡혔다. 딸이 너무 행복하단다. 그럼 됐지. 백만 원................................



'호구'라는 말의 어원이 갑자기 궁금해서 찾아봤다. 호랑이 호 虎, 입 구 口. 호랑이의 입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라고 한다. 죽기 직전의 매우 위태로운 상황. 아주 가끔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볼 때면 '내가 얘한테 잡아 먹힌다면?'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어린 시절 들어오고 읽어왔던 전래동화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호랑이 입의 위험함 때문에 바둑에서는 '호구'가 바둑 석 점이 이미 포위하고 있는 형국을 가리킨단다. (솔직히 나는 바둑을 잘 모른다) 그래서 그 안에 바둑돌을 놓으면 영락없이 먹히고 마는데, 그런데도 그곳에 돌을 기어이 디미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상대의 허술한 수를 읽고는 그의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것을 '호구 잡는다'라고 한다. 그렇게 손해를 입는 것을 '호구 잡히다'라고 표현하고. 


꼼꼼하게 이 업체, 저 업체 다 불러서 가격 물어봐서 비교하고, 전화응대는 얼마나 성실한지도 보고, 목소리나 말투는 얼마나 또릿또릿 한 지도 면밀하게 분석해서 사람을 불렀어야 하는데, 그저 아이가 밤낮없이 악취에 시달리는 것만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서 그만... 이렇게 제대로 호구를 잡히고야 말았다. 


오늘 오전에 읽은 글인데, 마음에 참 깊게 남아서 한 번 더 적어본다. 

사람살이 두루두루 서두르는 사람이 약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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