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못한다고 식당 일은 성격상 맞지도 않다고 극구 반대했지만 남편은 완강했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요즘은 가족운영이 추세라 무조건 같이 운영해야 된다며 더 이상 토 달지 말라고 했다.
싫었다.
너무 싫었다.
죽기만큼 싫었다.
손님한테 ‘어서 오세요.’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하고 넙죽넙죽 비위는 어떻게 다 맞춰야 할지 식당 운영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답답하고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생각이 많아서 며칠을 잠 못 이루다 남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같이 운영하는 대신 경제권을 완벽하게 넘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흔쾌히 알겠다고 한다. 그렇게 불끈 쥐고 있던 경제권을 왜 쉽게 넘겨주는지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반은 나의 뜻대로 된 것 같아 좋으면서도 자꾸 한숨이 나왔다. 식당 운영을 한 경험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는지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남편 말이 일단 대출부터 받자고 한다.
기겁했다.
나는 그 당시 대출이 무서웠고 혐오할 정도로 싫었다. 팔짝 뛰며 무슨 대출이냐고 돈 없냐고 물으니 돈이 없다고 한다. 운영자금들 다 어디 갔냐고 물으니 없다고 한다. 같은 말 반복하기 싫으니 그냥 대출부터 받자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돈 관리는 돈 버는 남자가 하는 거라고 걱정하지 말고 믿고 따라오라던 남편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서 기분이 얼얼했다. 남편의 표정을 보니... 이미 벌어진 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둘은 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부부싸움으로 번질까 봐 별말 없이 넘어갔다.
남편이 백수이니 돈은 어떻게든 벌어야 하고, 돈관리는 앞으로 내가 하고, 매장도 내 명의로 오픈하기로 했다. 이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서 외식업 경험 20년인 남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떨리는 마음으로 은행에 가서 내 명의로 된 생애 첫 대출을 받았고 상가 임대 계약도 했다. 팔달시장에 가서 테이블, 의자, 그릇, 수저 등 장사할 때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가스도 설치하고 닥트도 설치하고 페인트칠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매장 오픈을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안 가는 곳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유경험자인 남편 덕분에 진행이 착착 되어서 믿음이 갔다. 대출받은 2600만 원은 훅훅 나갔고 고작 몇 백만 원밖에 안 되는 돈을 수중에 쥐고서야 오픈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싫든 좋든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보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오픈이 왜 이리 더딘지 준비하다 보니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완벽하게 갖추기가 어려웠고 오픈 예정 날짜보다 2주나 미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언제 오픈하냐며 넋두리도 하고 슬슬 지쳐갈 때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동대표 회장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한 가지 부탁 겸 제안을 하셨다. 어버이날에 경로당 어르신들께 식사 대접을 해야 하는데 우리 오픈 날짜와 어버이 행사 날짜를 같은 날로 맞추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이다.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좋다고 외쳤다. 첫 오픈날은 기분 좋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이벤트를 열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잘 된 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의논한 끝에 돈은 받지 않겠다고 무료봉사하겠다고 말씀드리니 회장님도 아주 고마워하셨다. 경로당에 계시는 어르신 수보다 더 넉넉하게 40~50인분으로 준비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전체적인 준비는 미흡한 상태였지만 2018년 5월 1일에 어버이날 행사 겸 강제적 오픈을 했고, 이 제안이 아니었다면 6월 1일에 오픈했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감사한 마음이 아주 컸다.
오픈 날 많은 어르신들이 정가한을 찾아주셔서 열심히 음식도 만들고, 나르고, 정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지나가는 어르신들도 함께 섞여서 식사를 하셨는지 뚝배기 수를 세어보니 70인분이나 대접해 드린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아파트 관리소장님과 관리사무소 직원분들께서 함께 도와주신 덕분에 무료식사행사는 잘 마무리되었고 봉사하는 기분이 들어서 굉장히 뿌듯했다.
익일부터 정식 오픈을 했는데 많은 손님들이 정가한을 찾아오신 덕분에 오픈 빨 기간이 무려 6개월 이상이나 지속되어 몸은 힘들었지만 신바람이 났다. 마침 '웰빙'이라는 단어도 유행하던 시절이라 국산콩으로 매일 순두부를 직접 만들고 있다는 타이틀이 손님들 눈에는 굉장히 신선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