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편의점, 고요 속에서 흐르는 이야기들
주말 오후 알바를 시작으로 평일 오전-오후까지 알바 시간이 확장되었다.
화, 목을 제외한 월, 수, 금 평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9 to 6의 삶을 편의점에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장님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주 7일, 매일 일했다.
적게는 34시간, 많게는 39시간씩. 그러다 결국 교대 시간 직전에 잠수를 타는 일이 벌어졌고,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에게 평일 알바까지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사장 잠수탄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풀어보겠다.)
그리하여 하게 된 편의점 평일 알바.
월, 수, 금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내가 일하는 곳은 주택가 안쪽에 자리 잡은 편의점이라 평일 오전에서 오후 시간에는 정말로 한산한 편이다.
주말에도 그리 바쁘진 않지만, 평일을 해보니까 내가 이렇게 일하고 돈을 벌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평일 오전 시간을 편의점 청소를 하거나, 물건을 진열하거나, 유통기한을 검수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여기는 생활 밀착형 품목이 많은 편이다.
와사비, 참기름, 도시락 김, 생선구이, 오이와 애호박, 코인 육수까지 구비되어 있다.
담배와 몇 가지 생활용품들 수건, 배관 세정제, 충전기와 샴푸 린스, 휴지 등을 제외하면 편의점은 90%가 식품 종류라 유통기한 확인은 필수다.(요즘은 유통기한이라는 말 대신에 소비기한이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아무래도 입에 붙는 쪽은 유통기한이다.)
유통기한 체크를 할 때면,
왕가위 감독의 영화<중경삼림>이 떠오른다.
‘MAY 1’라고 적힌 파인애플 캔을 사 모으던 금성무의 모습이라든지,
하는 대사가.
그리고 누군가 금성무처럼 의미 있는 날짜를 모으는 사람이 찾아온다면,
나는 반드시 친절하게 그 날짜가 적힌 캔을 한가득 건네줄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당신에게 의미 있는 날짜는 언제인지 궁금 하다.
내겐 2월 1일과 8월 2일이 그렇다.
학교 다닐 때, 과방이 되어버렸던
나의 세븐일레븐 알바 시절도 생각이 난다.
돈이 없는 게 당연했던 대학생 그 시절. 내 동기들은 내가 알바를 하고 있을 때면 드문드문 찾아와 폐기 없어? 오늘은 도시락 없어? 하고 기웃대고는 했었지.
지금 주변에 친구들이 있다면 어서 놀러 오라고,
마구마구 남은 음식들을 싸다 줄 텐데,
다들 어디서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이미 9시 이전에 부지런히 다녀갔을 테고,
지금 오는 손님이라곤 담배를 사 가는 아저씨들이 몇 명. 점심 무렵 쯤 막노동을 하시는 분이 끼니를 때울 도시락 하나와 담배 한 보루를 사서 가는 게 다다. 그리고 한 남자도 있다.
세수도 안 한 거 같은, 머리에 거대한 까치집을 지은 남자가 아이스커피랑 도시락을 사서 간다.
그는 들어올 때는 인사를 하지 않고 뒤돌아서 나갈 때만 문에다 대고 인사를 한다.
양치를 안 하고 나온 게 확실하다.
그렇게 잠깐 잠깐 들르는 몇몇의 손님을 상대하는 것 빼고는
나는 다시 편의점 정돈에 열을 올린다.
한가한 낮.
피곤한 사장님이 미처 하지 못한 쌓인 먼지를 털거나, 간밤에 날아든 나방들을 치우고, 바닥을 닦아낸다.
밤과는 다르게 맞은편 빌라 끝에 선 해가 편의점 유리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거닐면서, 새로 나온 과자도 구경하고, 진열된 물건들 각도를 맞춰주면
편의점 CM송이 흐른다. 25분인가 보다.
‘GS 25에 간다 매일매일매일, GS PAY로 산다 바이바이바이~ ‘
익숙한 노래 틈 사이로 편의점 문에 달린 풍경 소리가 울린다.
선양 아저씨가 들어온다. 짧게 자른 까까머리에 팔뚝엔 무시무시한 타투가 그려져있고,
항상 페트로 된 선양소주를 사가서 선양 아저씨다.
무시무시한 겉보기와는 다르게 내가 인사를 걸면,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네오기
때문에 나에겐 좋은 손님이다.
자세히 보니 눈가에 보라색 멍이 들어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선양 소주와 편육을 집어 들었다.
눈은 왜 그러냐고 살짝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괜한 오지랖인 거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나는 낮에 술을 사러 오길래 유흥업에 종사하거나 혹시 조폭인가? 싶었지만
사장 말로는 그저 동네 술쟁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눈탱이 밤탱이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까치집 남자가 다시 왔다. 이번엔 1400원짜리 커피와 레종 프렌치 블랙을 달라고 한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는 정신을 차리려나 보다.
그는 아마 나처럼 컴퓨터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인 거 같다.
오후가 되자 소독차가 지나간다. 오랜만에 보는 희뿌연 연기다.
뿌연 연기가 자욱한 와중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소독차 뒤꽁무니를 따라 간다.
방학을 맞은 중학생은 바깥 파라솔에서 맥콜을 마시다가 조금 남은 병을 두고 자전거를 타고 떠나 버렸다. 페달을 밟는 아이의 발길에 남은 음료가 쏟아진다.
이놈의 새끼… 하면서 나는 흘린 음료를 닦아냈다. 연기가 가셨지만 매캐한 냄새는 남았다.
주말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들뜬 기분처럼 편의점에 활기가 도는데
평일 오후에는 모두들 살기가 바쁜지 나만 이 동네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든다.
빽빽하게 진열된 물건들처럼, 정해진 유통기한 속에서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지내고 있겠지?
나는 한낮의 편의점에서 시간을 진열하며 지내고 있어.
편의점은 항상 여기에 있다.
출근길 아침에도, 퇴근길 저녁에도. 그리고 당신이 출근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편의점 속의 나도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여기에 있다.
내가 이곳에서 지내게 될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일모레까지인 우유보다는 길 것이고,
구석에 무심하게 박혀있는
파인애플 통조림보다는 짧을 것 같다.
그 시간동안 나는 늘 이곳에 머물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 모두,
이곳으로 초대해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혹, 초대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우연히라도 이곳을 방문해 주면 참 고맙겠다.
6시 1분이 되었다.
오늘도 사장은 1분 지각을 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