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담선생님

진정한 나를 다시 찾게 되기까지의 시간들

by 새벽일기


그녀를 만난 건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라이프 코칭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17년간의 사회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인간관계는 버겁게만 느껴졌다.

대인공포증이 생겼는지 대화를 하려면 목부터 이마까지 열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평범한 대화에 집중하는 일조차도 어려웠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센터는 일반 아파트 안에 있는 가정집 같은 형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온기가 내 몸을 온전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 부엌, 그리고 방이 두 개인 구조의 아파트였다. 나는 전면의 회색 대리석

아트월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창밖의 화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느새 계절이 초여름에 성큼

다가선 풍경이었다.


“oo님”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자분이 앞에 서 있었다. 요즘에 사람을 동물에 비유해서 첫인상을 간편하게

표현하는 이들이 많았다. 강아지상, 고양이상, 사막여우상 등등.

굳이 고른다면 그녀는 강아지상 쪽에 닮아있었다. 큰 눈과 동글동글한 코끝, 도톰한 입매에

둥근 얼굴형. 함박눈을 잘 뭉쳐 만든 눈사람 같은 체형에 검은 단발머리.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다니던 속셈학원의 담당 선생님도 떠올랐다.

학원이 끝날 때쯤에 마주치면 늘 다정하게 손을 잡고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과자를

고르라고 했던 그 선생님. 그래서였을까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높은 내가 처음부터 선생님에 대해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은.



내 앞에는 찻잔에 담긴 따뜻한 둥글레차가 놓여 있었다.

손으로 찻잔을 감싸니 차가웠던 손끝에 온기가 전해졌다. 마음도 같이 몽글몽글해졌다.

선생님은 먼저 내가 이메일로 보낸 상담설문지를 앞에 놓고 있었다.

마치 고등학교 때 진로 상담을 받는 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기록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oo님과 상담하는 과정을 녹음하려고 하는데, 혹시 불편하시진

않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보내주신 설문지를 보니, 여초집단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관계 스킬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네요.”


“네.”


“oo님은 어떨 때 여자 직원들이 힘들게 느껴지세요?”


입사 초반에 사람을 쉽게 믿었던 나는 마음이 갔던 선배의 사적 질문에 나의 연애 얘기를

쪼잘쪼잘했다. 시간이 흘러서 그 언니가 나의 스토리를 동료에게 흘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일이 잦았다. 정황상 “그랬겠거니”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관계에 대해 여러모로 한참 고민을 하다가 차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가급적 회사에서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 되었고,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인사이동 시즌이 다가와 새롭게 업무분장을 하기 위해 동료들 열두 명이 둘러앉은 자리였다.

나는 근무지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분위기도, 사람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색함을 뿌리치고자 나보다 늦게 입사한 언니에게 가벼운 업무와 관련된 말을 건넸다.

“이 업무분장표 언니가 짜는거야?”라고 묻자 “그럼 네가 할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좀 방어적인 자세였다. “이런 게 텃세인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내 앞에는 화장지 여러 장이 구겨진 채로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머쓱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 오랜만이었다.

곁눈질로 앞에 놓인 실버색 녹음기를 바라보았다. 녹음기 가운데에는 초록색 작은 불이

깜빡깜빡하고 있었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번 주에는 한번 oo님이 회사에서 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동료의 반응을

살피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대해 보세요. “


“아……저는 상대가 저를 좀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거나 하면 다가가진 않아요.

관계도 상대적인 거니까요.“


“그래서 oo님에게 이 과제를 드리는 거예요. 상대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너무 배려하지 말고

oo님의 마음에 충실해서 관계에 다가가 보라는 거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동료와의 갈등에 부딪쳤을 때 대화를 걸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영 익숙지 않은 통에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혹은, “상대가 너무 감정적으로 세게 나오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대로 대화를 막상 시도해 보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쑥스럽고 민망하더라도 더듬더듬 대화를 시도해서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덕분에 관계가 잘 풀리는 경험이 축적되었다.



대화를 시도하기 전에 한글파일에 시나리오를 써둔 다음에 읊어보는 식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요령도 생겼다.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소화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고,

갈등을 회피하지도 않게 됐다. 일단 제일 큰 자신감이 생겼던 일은 선생님이 내가 상담 도중

던진 말에 박장대소를 할 때였다. 누군가를 웃길 수 있는 경험. 내가 구사하는 유머가

다른 사람을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 이런 걸 배워나갔던 것 같다.

우리 사이에 그런 일들이 켜켜이 쌓일수록 내 마음속에는 “선생님이 진짜 내 친구가 된다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다 이내 또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선생님은 그저 직업적으로 나를 받아주는 대화를 할 뿐인 걸 거야.”


마지막 상담일에 선생님은 감정을 다스리는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단순히 이론적인 부분이 아닌, 명상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 밑쪽 움푹 들어간 데를 가리켰다.

회사에서 감정이 고조되려 할 때는 한 템포 쉬어가는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내쉬라 했다.

선생님은 핸드폰의 타이머를 작동시켰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아니, 응시해서 서로의 마음을 조금은 들여다봤던 것 같다.

눈시울이 또 시큰해질 것만 같았다. 1분이라는 시간이 어떤 찰나의 시간인지 쪼개고 쪼개보았다.

상담 마지막 5분을 남기고 눈을 맞춤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말을 주고받은 기분이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 그리고 서로의 시선을 응시했던 1분이 끝났을 때 둘 다 환하게

웃으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어느 시공간을 헤매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나는 마침내 망설이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선생님, 제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그럼요.”


“선생님이 직업적인 상담자로서 저의 말을 들어주고 호응해 주고, 반응을 해주신 건지 궁금해요.”


선생님은 역시 나다운 질문을 했다는 듯 찡긋 웃으며 흥미로워했다.

만약에 오늘 이 질문을 하지 않고 상담이 마무리된다면 나는 못내 아쉬워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잠시 몇 초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입을 떼었다.


“저는 oo님이 말해준 에피소드 중에 oo님의 본모습에 가까운 에피소드가 매력 있고 예상 밖이라

재밌었어요.“


“뭐죠?”


“oo님이 사춘기 시절 선생님이 너무 미워서 나무 책상 위에 선생님 이름을 칼로 파고, 그 틈을

검은 매직으로 색칠했다는 거요.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oo님이 했달까. 제 개그코드에

가까웠어요.“



서랍 속 깊숙이 묻혀있던 에피소드였다. 선생님이 나를 혼낸 게 싫어서 커터칼로 나무 책상 위에

이름을 파고 꾹꾹 눌러 검은 매직으로 칠했던 기억. 그리고 하필 책상 위 판화 사건이 담임선생

님의 눈에 띄어 엄마가 학교로 불려 왔었던 기억. 그리고 이어진 엄마의 질책과 한숨.

나에게는 두 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괴팍한 나의 일면이었다.


“oo님은 엉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때 oo님 다운 매력이

발산돼요.“


재기 발랄한 내 모습을 그대로 받아준 친구들과는 달리 회사에선 입사 초반부터

“사차원이다.”, “쟤 보통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 그러한 피드백들은 한 바퀴 돌아서 내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이 귓속에 들려왔을 때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용수철 같은 회복력이 필요했다.

선생님과의 긴 대화 시간을 통해 내 마음에 용수철이 장착된 것 같았다.



상담실에서 나와 운동화 끈을 매는 동안 선생님은 조용히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끈을 다 동여매는 순간 우리의 만남도 끝날 것이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컨버스화 하얀 끈을 느리게 매며 시간을 잠시나마 붙잡고 싶었다.

90도로 고개를 숙인 후 악수를 청하자 선생님은 악수 대신 포옹을 하자고 했다.

팔을 살짝 벌린 선생님의 앞으로 다가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토닥였다.

선생님의 체온이 팔을 타고 내 등줄기까지 스며들었다.

서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미소는 내게 잘 살라고 보내주는 조용한 응원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