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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강아지 Dec 22. 2021

감사한 일

변기 물통 뚜껑을 닦다가

뚜껑이 물통 안으로 쏙 빠지면서 물통 바닥에 금이 갔다.

처음에는 금이 간 줄 몰랐는데 며칠 뒤에 귀를 기울이니까 물통 아래로 물이 아주 조금씩 똑똑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두꺼워 보이는 물통이 그렇게 쉽게 금이 갈 줄이야.



언니랑 레진도 발라 보고 실리콘도 발라봤는데

물이 새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매우 심란했다.

결국 집주인 아저씨께 말했다.

이사 올 때 새 것으로 바꾼 거라 죄송하고 민망하고

아저씨 앞에서 되게 작아졌다.

집주인 아저씨가 설비를 하셔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아저씨가 물통을 5만 원 주고 사 오셨다는데

5만 원밖에 받지 않으셨다.

아저씨는 기술자라서 시간도 돈인데 나 때문에

그 시간에 돈도 못 벌고 수리비도 안 받으시고...


고장내서 죄송하기도 하지만

돈도 안 받으시니까 두 배로 죄송했다.

돈이라도 바깥처럼 다 받으시면 덜 쭈그러들텐데.


변기를 깨서 가족들한테 미안하고

주인댁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요 며칠 손대는 것마다 고장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

원데이 클래스로 변기 수리하기 이런 거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친절한 집주인 아저씨.


아저씨는 사람을 만나면 늘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다.

눈빛도 항상 빛난다.

그 나이 때 아저씨들 중에 그렇게 활짝 웃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니다, 나이 성별을 떠나서 저렇게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 사람은 찾기가 힘든 것 같다.

처음  보러 왔을 때도 아주 활짝 웃으셨다.


아저씨는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생각도 깊고 배우는 것도 좋아하신다.

손자 손녀들이 해외여행 갔을 때도 선물 사 올 생각 말고 거기서 무언가 배우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우와...

얘기를 들어보니까 엄청 다재다능하신 것 같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시는 것 같다.

집 보러 왔을 때 처음 만났는데 그날 정치 얘기서부터

주위의 땅 얘기, 아저씨가 외국에서 일할 때 얘기,

그림 그린 얘기 등 엄청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번에 변기를 깼는데도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감사합니다.


아 맞다.

아저씨가 내 2021년 새해 목표도 정해주고 가셨다.

시집가기.


아저씨는 뭔가 고칠 게 있으면 고쳐야 하는데

우리 집에 고칠 게 또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변기를 고쳤지만 그래도 주인댁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불편했었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쭈그러들어 있었는데

다음날 주인아주머니가 키위를 엄청 많이 한 봉지 주셨다!

소심해서 굉장히 마음 쓰고 있었는데

마음이 키위처럼 둥글둥글해졌다.

친척집에 가서 직접 따온 건데 따느라 힘드셨다고 한다.

설탕 넣어서 키위청을 담아먹으면 아주 맛있다고 했다.

아 정말 감사하다.

아주머니 키위 덕분에 쭈그러들었던 게 활짝 펴졌다.


아주머니 아저씨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는 현관문 앞에 무 다발이 놓여있었다.

뽀얗고 싱싱한 무.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추측했는데

지난여름 노각을 주신 아주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호박밭 아주머니였다.

감사하다

아주머니 무 맛있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빨래 넌다고 마당에서 얼쩡거리다가

옆에 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주머니께 배추를 세 포기나 받았다.

여름에 노각을 주셨던 아주머니.


아주머니 부담스러울까 봐 아주머니가 밭에 계실 때는

마당에 안 나가려고 했는데 언니가 괜찮다고 그냥 빨래 넌다고 해서 그렇다.

조금 있다가 널자니까는...


생각해보니까 이웃들을 진짜 잘 만난 것 같다.

아니면 원래 다른 동네도 이렇게 잘 나눠먹는 건가?

그러고 보면 전에 살던 동네 이웃들도 참 좋았다.

우리 가족은 잘 안 나눠먹는데 많이 본받아야겠다.


아주머니가 배추쌈 싸 먹으면 맛있다고 해서

한 포기는 쌈 싸 먹고 한 포기는 겉절이를 해서 먹었다.

요새 배추는 그냥 씹어먹어도 맛있다.


무는 무생채도 해 먹고 육수에도 넣어먹고 아직도 남아있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변기 뚜껑이 그렇게 된 건

내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집 같은 변기는 뚜껑이 물통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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