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물통 뚜껑을 닦다가
뚜껑이 물통 안으로 쏙 빠지면서 물통 바닥에 금이 갔다.
처음에는 금이 간 줄 몰랐는데 며칠 뒤에 귀를 기울이니까 물통 아래로 물이 아주 조금씩 똑똑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두꺼워 보이는 물통이 그렇게 쉽게 금이 갈 줄이야.
언니랑 레진도 발라 보고 실리콘도 발라봤는데
물이 새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매우 심란했다.
결국 집주인 아저씨께 말했다.
이사 올 때 새 것으로 바꾼 거라 죄송하고 민망하고
아저씨 앞에서 되게 작아졌다.
집주인 아저씨가 설비를 하셔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아저씨가 물통을 5만 원 주고 사 오셨다는데
5만 원밖에 받지 않으셨다.
아저씨는 기술자라서 시간도 돈인데 나 때문에
그 시간에 돈도 못 벌고 수리비도 안 받으시고...
고장내서 죄송하기도 하지만
돈도 안 받으시니까 두 배로 죄송했다.
돈이라도 바깥처럼 다 받으시면 덜 쭈그러들텐데.
변기를 깨서 가족들한테 미안하고
주인댁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요 며칠 손대는 것마다 고장내서 자존감이 낮아졌다.
원데이 클래스로 변기 수리하기 이런 거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친절한 집주인 아저씨.
아저씨는 사람을 만나면 늘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다.
눈빛도 항상 빛난다.
그 나이 때 아저씨들 중에 그렇게 활짝 웃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니다, 나이 성별을 떠나서 저렇게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 사람은 찾기가 힘든 것 같다.
처음 집 보러 왔을 때도 아주 활짝 웃으셨다.
아저씨는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생각도 깊고 배우는 것도 좋아하신다.
손자 손녀들이 해외여행 갔을 때도 선물 사 올 생각 말고 거기서 무언가 배우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우와...
얘기를 들어보니까 엄청 다재다능하신 것 같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시는 것 같다.
집 보러 왔을 때 처음 만났는데 그날 정치 얘기서부터
주위의 땅 얘기, 아저씨가 외국에서 일할 때 얘기,
그림 그린 얘기 등 엄청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번에 변기를 깼는데도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감사합니다.
아 맞다.
아저씨가 내 2021년 새해 목표도 정해주고 가셨다.
시집가기.
아저씨는 뭔가 고칠 게 있으면 고쳐야 하는데
우리 집에 고칠 게 또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변기를 고쳤지만 그래도 주인댁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불편했었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쭈그러들어 있었는데
다음날 주인아주머니가 키위를 엄청 많이 한 봉지 주셨다!
소심해서 굉장히 마음 쓰고 있었는데
마음이 키위처럼 둥글둥글해졌다.
친척집에 가서 직접 따온 건데 따느라 힘드셨다고 한다.
설탕 넣어서 키위청을 담아먹으면 아주 맛있다고 했다.
아 정말 감사하다.
아주머니 키위 덕분에 쭈그러들었던 게 활짝 펴졌다.
아주머니 아저씨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는 현관문 앞에 무 다발이 놓여있었다.
뽀얗고 싱싱한 무.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추측했는데
지난여름 노각을 주신 아주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호박밭 아주머니였다.
감사하다
아주머니 무 맛있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빨래 넌다고 마당에서 얼쩡거리다가
옆에 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주머니께 배추를 세 포기나 받았다.
여름에 노각을 주셨던 아주머니.
아주머니 부담스러울까 봐 아주머니가 밭에 계실 때는
마당에 안 나가려고 했는데 언니가 괜찮다고 그냥 빨래 넌다고 해서 그렇다.
조금 있다가 널자니까는...
생각해보니까 이웃들을 진짜 잘 만난 것 같다.
아니면 원래 다른 동네도 이렇게 잘 나눠먹는 건가?
그러고 보면 전에 살던 동네 이웃들도 참 좋았다.
우리 가족은 잘 안 나눠먹는데 많이 본받아야겠다.
아주머니가 배추쌈 싸 먹으면 맛있다고 해서
한 포기는 쌈 싸 먹고 한 포기는 겉절이를 해서 먹었다.
요새 배추는 그냥 씹어먹어도 맛있다.
무는 무생채도 해 먹고 육수에도 넣어먹고 아직도 남아있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변기 뚜껑이 그렇게 된 건
내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집 같은 변기는 뚜껑이 물통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