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분짜리 영화와 300쪽짜리 책이 지닌 힘

<옥자>를 보고 쓴 단상

by 궁금한 민지

영화 <옥자>를 봤다. 틸다 스윈튼이 CF에서 봤을 법한 산뜻한 프레젠테이션 영상과 등장했다. 선대의 회사 운영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을 곁들이면서 자신이 도입한 혁신을 말했다. 자연과 기술의 아름다운 조합으로 슈퍼 돼지 스물일곱 마리가 태어났다고 전했다. 옥자는 그중 하나였다.


영화에서 단연 불편한 건 내용이었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 사실 말이다. 육식과 공장식 축산에 대한 논의는 이제 새롭지 않지만, 여전히 '예상 가능한 충격'을 준다. 옥자와 떠나는 미자의 뒤로는 이름 없는 슈퍼 돼지들이 가득하다. 미자는 금돼지를 넘기며 가까스로 옥자를 구할 수 있었지만, '옥자'뿐이었다. 무수한 슈퍼 돼지들은 이름 없는 채로, 아니 이름이 없어서 컴컴한 공장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우리의 피와 살이 된다.


때때로 한 편의 영화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단지 취향의 목록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가치관을 정립하거나 뒤흔들어버린다. 타인의 삶에 공감하는 계기가 되고, 미처 보지 못했던 현실의 이면을 보여준다. 90분짜리 영화가, 300쪽짜리 책 한 권에는 놀라운 힘이 잠재한다.


'육식'에 대해 받은 가장 충격적인 인상은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로부터였다. 공장식 사육장 여러 곳을 돌며 조사한 자료들, 도살 현장을 비롯한 축산 환경,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활자 앞에서 '잔인한데다 비합리적인’ 육식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채식을 해야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주제에, 자주 먹진 않으니 꽤 시도할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기억의 부정확함을 감안하고 말하자면, 당시 나는 2주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를 씹고 삼키면서 얻는 입안 가득한 포만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기를 안 먹는 대신 탄수화물을 많이 먹었다. 감자와 고구마 같은 뿌리채소를 조리해 먹었다. 요리법은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고기의 살만 끊었지, 유제품은 끊지도 못했고. 결국 나는 고기를 다시 먹었다. 책에서 받은 자극이 흐려진 탓이었고, 남의 살 맛이 그새 그리웠기 때문이다.


당시 <옥자>를 봤다면, 한 달 정도는 육식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는 예민하고 단호했다. 지금의 나는 자극에 무디다. 설사 감명을 받았을지언정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동력을 상실한다. 다짐은 드문 일이 되고, 행동력은 약해진다. 이젠 내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은 사람이란 걸 안다. 이성보다 욕망이 더 앞서는 때가 많다는 걸 안다. 무엇보다 결심을 저버리는 데에는 약간의 귀찮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게는 불성실한 지구력이 있다. 육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엔 일회용품처럼 소모되는 플라스틱 커피잔에 대해 고민한다. 일회용품을 안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 뒤부터다. 텀블러를 산 지 한 달이 넘었다. 여전히 '귀찮다'와 '까먹었다'는 이유로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지만, 세 번 중 한 번은 텀블러를 사용한다. 마치 간헐적 단식처럼 못 할 때도 있지만, 꾸준히 하려고 노력한다.


'채식을 하겠어’ '텀블러만 쓰겠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순 없다. 자조하고 싶진 않다. 자신을 비웃기 시작하면 세상이 우스워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냉소에서 꽃필 수 있는 건, 환멸뿐이다. 사소한 몸짓이라도, 작은 변화라도 응원해주자. <옥자> 같은 영화도 다 그렇게 태어나는 게 아닐까.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작지만 중요한 변화를 꿈꾸면서 말이다.

누군가의 생각이 담긴 결과물은 누군가의 일상을 사소하게나마 바꾸고야 만다. 우리는 극장을 나서면서, 책을 덮으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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