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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an 27. 2024

행복한데 건강한 사랑을 하고 싶어

그놈의 ‘좋은 연애’를 못해서 쓰는 한탄

최근 이직을 하면서 직장 두 곳에서 이십 대 중반의 직원 각각과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는 F 특유의 온화한 분위기가 눈빛에서 느껴진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유일하게 그녀들이 동일한 상태로 접어든 순간이 있었는데 이제 100일에 접어든 연인 얘기를 할 때였다. 다른 주제의 스몰토크를 할 때 그들이 잿빛이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갓 시작한 연애 얘기를 할 때는 또렷한 생기가 느껴졌다. 적당히 사회성을 입어 약간의 회기를 띠는, 덕분에 무탈한 사회적 교류를 가능케 하는 베일이 일순 걷혔고, 그녀들은 전면적으로 드러난 빛이 부끄럽다는 듯 말을 아꼈다. 행복해 보였다.


사랑에서 빠져나오고선 한동안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스스로 한심하다는 감각이었다. 동시에 나 자신만큼 투사쟁이인 상대에 대한 한탄이 뒤따랐다. 사랑이 끝날 때쯤 나는 문제를 알았다. 우리의 사랑은 터널에서 이뤄졌고, 그 터널은 흙으로 만든 두꺼비집 안의 터널이라는 것을. 각자 해결되지 못한 짐을 두꺼비집처럼 쌓아놓은 상태에서 저 너머로 건너가고 싶던 두 남녀가 양쪽에서 저편을 향해 파 내다가 가운데에서 만난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가 파온 길로 오갈 순 있지만 없는 길을 만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럼 머리 위의 흙더미가 그대로 내려앉을 테니까.


감히 말하건대 사랑은 눈멀어서 시작된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할 이유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다 어느 정도 사랑스럽고, 그 점에서 특출난 사람은 없다. 눈먼 상태 덕에 사랑은 성사된다. 그런 이유로 사랑에 겨워하는 이들을 보면 종종 우습다. 어차피 사랑은 투사에 투항해 시작되는 멍청한 희극이라고 생각하기에. 동시에 부럽기도 하다. 눈을 먼 것은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냉소와 부러움이 한데 섞이는, 이런 시선을 던질 만한 일이 몇이나 있을까. 눈을 멀게 하는 건 다들 알다시피 콩깍지다. 지난해 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딱 맞는 짝을 만난 기쁨에 겨웠었다.

Aghamyan @Unsplash




언제나 행복은 배타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타인의 슬픔에는 공감할  있어도, 타인의 행복에 공감하긴 쉽지 않다.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다. 언젠가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이라는 책에서 읽었는데, 결혼한 부부에게서 결혼해서 좋은 점을 물어도 적당한 대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부부의 결혼생활이 그들만의 것이기 때문이란다. 과연 그렇다. 나는 매일 동생의 연애사에 힘든 부분을 현자처럼 들어주고 조언할  있으나, 둘의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 앞에선 무능하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행복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고선 부스러기  톨도 가늠이 불가능하다.


행복은 자기중심적이다. 이는 흔히 나르시시스트를 암시하는 ‘자기중심적이라고 쓰는 표현과는 무관하다. 그대로 자기가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한가운데 서서 방 안을 둘러보는 것처럼. 극장의 E 9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처럼. 물론 영화와 다른 점은 영화는 대상을 바라보지만, 행복은 본인을 중심에 두고 본인을 에워싼 지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은 1인칭 주인공 시점.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이다. 행복은 누구의 관심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주어진 환경에 느긋이 놓아둘 것을 청한다. 그래서 행복은 방심한 자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존재한다. 때때로 자신의 존재감을 어렴풋이 드러내지만, 대부분 과묵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행복한 연애’ 말고도 자주 언급되곤 하는 ‘건강한 연애’는 어떨까. 건강한 사랑은 ‘좋은 사랑(good love)’ 쯤으로 번역될 수 있다. 사람들은 연애에도 불량한 연애가 있고, 양질의 연애가 있다고 말한다. 좋은 사람과 건강한 연애를 해야 한다는 게 주된 조언 중 하나. 건강한 연애를 행복한 연애와 비교해 본다. 건강은 3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자신과 상대를 타인처럼 바라봐야 한다. 관계의 당사자이지만 관계에서 유체이탈해 의사처럼 관계를 진단해야 한다. 정신적 인슐린이 잘 조절되고 있는지(상대가 퍼붓는 애정공세에 도취돼 있진 않은지), 관계에 근육량은 감소하고 체지방이 늘진 않았는지(익숙해졌다는 이유로 상대에 대해 지레짐작하진 않는지) 등등.


눈이 나쁜데 안경을 안 쓰고 급기야 콩깍지를 아이홀에 끼고 있다는 건 건강 관점에서는 안 될 말이다. ‘건강한 연애’ 센서는 이제 막 상대와 100일, 길게는 6개월 이후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마찰을 일으킬 때 작동한다. 아무래도 난 회피 유형이고 넌 불안 애착 유형인 것 같아. 나는 SF라 네 기색을 살피는 데 능하고 말을 예쁘게 하는데 너는 내게 인과적 데이터로 솔직하게 응답할 것을 요구하는구나. 그리고 생각한다. 이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것 같아. 이는 상대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관계에 대한 조망권을 확보해야 가능하다. 산을 나무 밑동에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연애의 건강도를 점검하려면, 관계를 드론이 산 전체를 내려다보듯 순찰할 수 있어야 한다.




몇 번의 눈먼 연애를 경험했다. 몇 달 안팎의 약시 기간은 분명 나의 채도를 올렸을 것이다. 여전히 그 비비드한 시기 한가운데 있는 지인들을 보면 부럽다. 어리석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눈먼 채로 사랑을 하는 건 불수의근처럼 내 손을 떠난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할 일 많은 큐피드의 덫에 운 좋게 걸려든 소수의 사람이 받는 선물이다. (행복한 모든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그러한 덫의 혜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질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행복과 건강은 반대가 아니다. 그냥 사랑의 여러 속성 가운데  개다. 행복한데 건강한 사랑도, 행복한데 건강하지 않은 사랑도 있다. 후자가 가장 흔한 케이스겠다. 내가 거쳐온 모든 사랑의 역사 역시 초반 3개월, 길게는 1년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행복하기만 한 사랑은 관계를 관찰하는 힘을 잃는다. 콩깍지가 벗겨진 시기 나는 시력을 되찾기 위해 안경을 찾아 헤맸다. 교정시력으로 나와 그를 보려는 순간 그는 우리 사이엔 아무 문제도 없다며 안경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안경알을 빼내려는 그를 뒤로 하고 도망갔다.


행복한데 건강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는 다중우주의 실물을 찾는 것만큼이나 실천하기 까다로운 작업이다. 씹을수록 단물이 고이는 갓 지은 밥 같은 행복에 젖다가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찰나 공구를 꺼내드는 건강한 관계라니. 행복한 사랑은 온전한 방심에서 이뤄지는데, 건강한 사랑은 나와 상대의 수상한 변화를 감지하고 의혹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뾰족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행복한데 건강한 사랑을 하고 싶다니. 디스코팡팡 한가운데에서 널뛰기를 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Egor Vikhrev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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