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눌리지 않는 순간에 대하여

메드베데바가 알려준 들숨의 중요성

by 궁금한 민지



베토벤 소나타 7번을 레슨받는다. 8분음표가 촘촘하게 이어지더니 4분음표 두 개가 프레이즈의 끝을 알린다. 이어지는 4분쉼표 두 개. 선생님이 옆에서 짧게 숨을 들이쉰다. 나는 곧 왼손의 8분음표 ‘레’를 직타한다.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여기서 4분쉼표 2박을 정확히 쉬어줘야 해요. 첫 번째 프레이즈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다음 프레이즈가 시작되기 전 긴장감을 줘야죠.”

몇 주전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났다. 갑자기 웬 올림픽 이야기인지 의아할 테다. 피겨 스케이팅 팀이벤트 여자 싱글 쇼트에서 메드베데바 예브게니아 선수​가 OAR 자격으로 출전했다. 그는 쇼팽의 녹턴 20번을 따라 가볍게 얼음 위를 뛰어올랐다. 피겨 기술에 문외한인 터라 음악을 표현하는 표정에 주목했다. 얼굴에는 한껏 응축됐다가, 일그러뜨렸다가, 고조되는 감정이 담겼다.

가장 놀라운 순간은 곡의 말미였다. 그는 ‘레이백 스핀’을 마치고 고요하게 정지했다. 구심점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회전하던 음표들이 고스란히 흡수된 것만 같았다. 공기는 빙글빙글 돌다가 잠잠해졌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 자신을 둘러싼 공기를 들이쉬었다. 들숨 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이후 닫힌 눈꺼풀이 열리자 눈동자에는 여운이 차올랐다.

메드베데바의 표정을 음악에 비유해본다. 악보에 그려본다면, 4분쉼표 위에 페르마타(늘임표)가 올라간 모양이 아닐까. 그는 신체를 그릇 삼아 공기를 모음으로써 엔딩을 준비하고 있었다. 들숨은 피겨의 대단원을 알리는 역할이었다. 나는 메드베데바가 숨을 들이마시는 장면에서 선생님이 말한 쉼표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음악은 소리 만큼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순간’으로 구성된다. 악보 위의 쉼표와 건반이 아닌 허공에 머무르는 피아니스트의 손이 이를 증명한다. 음악적 순간은 타건과 타건하지 않는 시간 사이에서 탄생한다. 음악은 연속과 정지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생동한다. 모호한 리듬과 피로하게 이어지는 음으로는 음악을 만들 수 없다.

그가 회전을 멈추자마자 후련하다는 듯 웃었다면, 여운은 길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무언의 동작을 통해 피겨를 완성했다. 호흡은 피아노에서나 피겨에서나 결정적이었다. 나는 가장 정확한 박자에 프레이즈의 매듭을 지어야만 했다. 끝을 예고하려면 결정적 순간에 들숨을 쉬어야 한다. 내게 부족했던 것은 그 한 번의 호흡이었다.




+글감을 착안한 뒤 완성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흑. 사실 요즘 피아노가 1번이라. 뭐, 피아노 덕분에 이런 글도 쓰니 다행인 걸까? 다음 번에도 피아노 글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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