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를 연주하는 마음

보이지 않는 것을 기록하기 ①

by 궁금한 민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록하기’ 시리즈에는 이해를 돕고자 연주 영상 링크가 첨부됩니다.


익히 들어본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일은 충격의 연속이다. 먼저 악보라는 2차원의 지도를 맞닥뜨려야 한다. ‘들리는’ 음악과 ‘보이는’ 음악의 격차는 당혹감을 유발한다. 곡은 단순하게 들리는데 악보가 빼곡한 경우와 음악은 복잡하게 들리는데 악보가 단조로운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은 후자였다. 화려하게 들리는 연주와 달리 악보에는 여백이 가득했다.


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 악보, Youtube




과제 1, 셋잇단음표와 팔분음표를 한 박에


안도감도 잠시, 만만하게 봤던 마음은 금세 사그라졌다. 균일한 간격으로 늘어선 콩나물은 셋잇단음표였다. 첫 과제는 셋잇단음표에 팔분음표를 끼워 넣는 것. 셋잇단음표를 치는 일은 1/3+1/3+1/3=1을 만드는 작업이다. 고로 소수점이 무한대로 계속되는 33.33333…인 음을 손가락으로 표현해야 한다.


리듬감이 떨어지면 셋잇단음표 연주는 쉽지 않다. 그나마 셋잇단음표만 있는 마디는 괜찮다. 문제는 한 박 내에 왼손과 오른손의 리듬이 다를 때 발생한다. 심지어 두 손의 리듬이 똑 떨어지지 않을 때 어려움은 커진다. 왼손은 8분음표가 두 개인데, 오른손은 셋잇단음표 한 개다.(0:14) 어릴 적에는 셋잇단음표를 부점으로 뭉갰다. 그러나 내 귀는 말했다. ‘그렇게 쳐선 이 곡이 될 수 없어.’


급기야 음의 박자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오른손과 왼손의 음표를 수학 공식을 풀 듯 끼워 맞추려고 애를 썼다. 오른손 셋잇단음표 음을 분할해 왼손의 8분음표 사이에 배치를 시도했다. 마치 무리수의 소수점 마지막 수를 구하는 수준이었다. 머리로 음표들이 교차하는 시점의 값을 구하더라도, 정확한 타이밍에 건반을 누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왼손 8분음표는 손가락에 맡기고, 오른손에 온 청각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뚱-따앙---땅 하고 음이 늘어지거나 급하게 끝나지 않도록 오른손에 귀를 기울였다. 귀가 오른손을 향한 탓에 얼굴은 왼편으로 돌려지고, 시선은 허공을 향했다. 그렇게 며칠을 연습하자 귀를 세운 만큼 손가락은 적절한 시점에 다음 음을 향해 나아갔다.




과제 2, 두들기지 말고, 매끄럽게 연주해야지


리듬이 해결되자 이젠 터치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라베스크 1번을 들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이 곡은 물 위를 미끄러지며 펼쳐지는 듯한 선율이 특징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음들은 튀지 않은 채 유려하게 이어져야 한다. 둔탁하게 누르거나, 미끄러지는 느낌이라고 해서 소리가 헐거워지면 연주가 미워진다.


뚱땅뚱땅 치는 게 목적이라면 어렵지 않다. 손가락만 빠르고 건조하게 이동시키기는 쉽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조금만 들어보면, 이게 아니구나! 하고 깨닫는다. 이 곡을 체화한 연주자라면 고개나 몸이 음의 길이·높이에 따라 자연스레 흔들리게 된다. 바람 따라 나부끼는 갈대처럼 말이다.


나는 음을 명징하게 칠뿐 곡에 선율을 불어넣지 못했다. 선생님은 첫 두 마디에 크레셴도와 데크레셴도를 그렸다.(0:00) “이렇게 연주하면 더 표현하기 수월할 거예요.” 기호대로 연주해보니 전보다 음악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이어서 선생님은 “캔버스에 색을 입힌다고 상상해봐요”라고 덧붙였다. 뚝뚝 끊기는 음 사이에는 색과 사이를 잇는 그라데이션 같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기본 원칙은 음의 지속성과 높낮이였다. 연이은 셋잇단음표 뒤에 등장하는 4분음표는 잔잔하게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큰 물방울에 의해 밀려나는 것처럼 표현하고자 했다. 깊고 울림 있는 터치로 음에 파동을 만들었다. 터치는 따뜻하되 무겁게 처지지 않도록 데크레셴도를 더했다. 세기와 터치를 조절하자 음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물결처럼 묶이기 시작했다.




발전1, 부분적인 심상을 그리다


원하는 만큼 연주하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처음 이미지를 그린 부분은 왼손과 오른손이 셋잇단음표와 4분음표를 주고받은 뒤 2분음표가 등장하는 마디였다.(0:05) 주요 선율인 윗소리는 C#(도)-F#(파)-C#(도), C#(도)-F#(파)-A(라), 한 박 쉬고 A(라) 음이 두 박자 동안 지속됐다.


균일하게 이어지는 4분음표 뒤에 따라오는 2분음표는 달리 연주해야 했다. 음표 위에 그림을 그렸다. 물방울 주위로 물이 퍼지는 모양이었다. 큰 물방울이 수면 한가운데로 떨어지면, 파동이 생긴다. 이후 등장하는 셋잇단음표 G#(솔)-F#(파)에는 테누토(tenuto)가 달려있었다.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들은 물방울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첫 번째 물결, 두 번째 물결로 표현키로 했다.


아라베스크 1번은 템포가 중요한 곡이다. ‘루바토’는 템포를 연주자의 재량에 맡긴다는 빠르기 말이다. ‘점점 빠르게’라는 뜻의 ‘스트린젠도(stringendo)’도 ‘루바토’의 맥락 아래 이해해봤다. 고무줄을 잔뜩 당긴 느낌을 상상했다. 고조되는 긴장은 원 상태로 돌아갈 것을 예감케 한다. ‘루바토’가 박자를 훼손하지 않는 것처럼.


4분음표에 이어 2분음표가 나타나는 마디에서는 현재 누른 음이 뒤따라오는 음에 밀려나는 듯 표현했다.(0:28)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아르테미스와 청년 악타이온이 떠올랐다. 달빛이 일렁이는 호수에서 몸을 씻는 여신과 그를 보게 된 악타이온을 생각했다. 아르테미스의 살결을 훑던 악타이온의 시선은 아르테미스의 눈에 멈추고, 그는 얼어버린다. 긴장감은 절정으로 치달은 뒤 풀어진다.




발전2,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 빚을 지다


일부분 심상을 구축하니 좀 더 연주 같은 연주가 가능해졌다. 퍼즐을 맞추듯 외따로 떨어진 이미지를 이어 붙이면, 연주는 물 흐르듯 진행될 수순이었다. 모든 일은 자연스럽고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악보가 모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연속되는 셋잇단음표는 호수를 유영하는 새끼 오리를 떠올리게 했다. 자맥질하고, 벌레도 잡아먹고, 풍경을 훑어보며 물을 가르는 새끼 오리. 곡의 화자가 된 오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저 옆의 백조를 동경한다고. 언젠가 그처럼 찬란하게 날아오를 거라고. 높아지다가 하강하는 셋잇단음표의 음정은 한숨이 배인 어조로 낮게 속삭였다.



루바토가 지배하는 부분에서 새끼 오리는 좌절된 꿈과 여전히 버리지 못한 기대감을 털어놨다.(0:28) 또 비상에 대한 갈망,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날갯짓을 구사할 수 있는지 힘주어 말했다. 앞 음정을 박차 오르면서 빨라지는 박자는 새끼 오리가 꿈꾸는 미래를 음악으로 구현하게 했다.


오리는 ‘리졸루토(risoluto)’ 부분에서 비상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리타르단도(ritardando)’에서는 다가올 봄 늠름한 깃털이 자라고, 성숙한 외면만큼 그의 내면도 성숙할 것을 예고했다.(0:47) 나는 새싹이 푸르게 움트는 봄을 보았고, 멀리서 꽃망울이 터지듯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오리를 목격했다.




연습 말기에는 연주의 색채감을 살리기 위해 그즈음 본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이미지로 차용했다. 엘리자와 크리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끌어왔다. 엘리자의 손이 닿을 때마다 크릐처의 몸은 푸른 빛을 내뿜는다. 연인의 손길에 은은하게 반응한다. 살결을 쓰다듬는 촉감을 연상하자 색채감을 더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성급하다. 그럴듯한 연주를 하고 싶어 손가락만 급하게 놀린다. 그럴 때일수록 연습이 무엇인지 상기하고자 한다. 연습이라는 믿는 구석이 없는 연주는 듣는 이를 불안하게 한다. 허약한 음색만 허공에 떠돈다. 제아무리 잘나도 주의력을 기울인 연습 없이 ‘연주’는 탄생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연주의 뒷면, 연습을 기록하려는 이유다.



+선생님께 한 번 보여드려야 하나 싶은 글이 됐다. 혹여 악보 기호나 용어에 있어서 틀린 부분이 있다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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