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을 받아도 웃지 못하는 이유

실망하기 싫어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어

by 궁금한 민지

베토벤 소나타 7번 1악장을 3개월째 레슨받고 있다. 지친 기색을 내비치자, 선생님은 “연습이 힘들죠”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능 있는 한 학생이 있는데, 한 곡을 오래 연습한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다른 학생들이 한 곡을 길게는 8개월 이상 연습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요지는 <한 곡을 완성하는 일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옆길로 새나갔다. 재능 있다는 그는 어떻게 연주할까. 관심은 해묵은 단어인 ‘재능’에 쏠렸다. 논지를 벗어난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다 커서 ‘재능’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탐내는 심리는 무엇일까.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한 동경? 믿는 구석이 있어서 좋겠다는 질투? 재능이 있으니까 조금만 애쓰면 되겠다는 부러움?




일화가 더 있다. 이번 주에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이 정도면 전공생 수준으로 연주한 거예요.” 선생님은 레슨실에서 연주를 듣더니 홀에서 연주해보자고 하셨다. 그랜드피아노에 퍽 익숙해진 걸까. 우려와 달리 꽤 해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놀랐다. 분명 뿌듯했지만, 어쩐지 웃을 수 없었다.

성취감이 스치자마자 부족함이 눈에 띄었다. 템포는 끌어올렸지만, 터치가 여전히 문제인데…. 칭찬을 들으면 선뜻 기뻐하지 못한다. 그나마 이룬 것도 무너질까 두렵다. 성과를 돌아보기보다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한다. 자만심을 경계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쉽게 자만하는 성향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한순간의 칭찬도 흔쾌히 수긍하지 못할까.


지난한 연습 이야기와 칭찬에 대한 감상은 언뜻 보면 무관하다. 하지만 두 사례는 ‘재능’이라는 단어에 집착한 이유를 일깨웠다.




칭찬을 받아도 머뭇거리는 이유는 성취를 통한 환희보다도 실패로 인한 쓰라림에 자극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극이란 동기부여 따위가 아니라, ‘영향을 받는다’는 중의적인 뜻이다. 긍정적인 피드백이 거듭돼도, 한 번의 실패는 지진처럼 기반을 흔든다. 실망하기 싫은 탓에 성취를 축소한다. 칭찬받는 내 뒤에는 아직 하지도 않은 실패에 겁먹고 웅크린 내가 있다.


재능을 우러러보는 마음도 같은 맥락이다. 실패가 무섭기 때문이다. ‘재능 없음’은 노력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좋은 핑계다. 내 실패는 예정되었다며 자위한다. 가장 빠르고 그럴듯한 이유로 실패를 회피한다. 물론 탁월한 재능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재능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이룬 것과 망친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용기가 없어서 짐짓 자신을 타일러온 게 아닐까. 소설가 에리카 종은 말했다. “누구나 재능은 있다. 드문 것은 그 재능이 이끄는 암흑 속으로 따라 들어갈 용기다.” 여전히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피아노도 그렇고, 글도 그렇다. 누군가는 날 때부터 횃불을 들었을 테고, 누군가는 담배에서 튄 듯한 불티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터널 안이 궁금하다면, 불티에 부채질할 용기 정도는 키워야 하지 않을까.


'드뷔시를 연주하는 마음'이라는 글을 썼던 어느 날, 건대의 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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