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애크로이드 ‘Occupation(2024)'를 보고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확실한 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나는 왜 뭔지도 모르는 것을 보고 ‘좋다’고 느끼고, 감상의 배경을 추적하는 걸까. 좋다고 느낀 것을 왜 좋은지 말하려는 욕구는 글쓰기의 오랜 출발이다. 한 작품을 보고 똑같은 감흥을 느끼진 않더라도, 감상을 나눌 수는 있다. 그리고 감상이 그저 기분을 나열하는 독백이 되지 않으려면, 감상을 전달할 언어를 찾아야 한다.
레베카 애크로이드의 《The Party Is A Woman》 전을 봤다. 발칙하다고 느낀 그림이 있었다. ‘Occupation(2024)’. 뾰족하게 내민 혀, 수분을 기다리는 꽃의 수술, 재빠르게 내빼는 동물의 꽁무니, 부풀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샐쭉해지는 클리토리스 이 모두를 닮은 그림. 흥미로웠던 이유는 ‘해볼 테면 해 보라지’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 진 모르겠는데, 그건 네 몫이고 난 이만 갈게’하는 느낌이랄까.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은 사라지는데 생각은 파장처럼 번져간다. 분명 정지된 그림인데 gif처럼 느껴진다.
이번 글은 최근 쓴 글 중 가장 오래 지체했다. 도통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뭘 쓰려는지 정해지지 않아서였다. ‘이 그림이 재밌더라’ 외에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구글링을 했고, 많은 기사와 인터뷰를 봤다. 스탠리 큐브릭과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보고, 몸을 건축과 연결짓는 작가. 여성의 성욕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제약, 생식에 대한 기술 통제에 대한 화두. 그렇게 얻은 정보를 기존에 느낀 감흥과 연결시켜야 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꼭 설계대로 움직여야 할까? 목적을 수립한 뒤 계획대로 진척시키는 글은 정형화된 글쓰기에 대한 강박 아닌가. 레베카 애크로이드는 3년 전 베를린의 페레스 프로젝트에서 연 《100mph》 전에 관한 sculpture과의 인터뷰에서 작품은 있지만, 이를 어떻게 모을지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고 밝혔다. 작품을 하나의 전시로 통합하는 과정은 시행착오의 여정이었으며, 마침내 작품들이 조응하는 순간에 다다르자 “it just started to sing, or scream(노래하고, 소리쳤다)”고 설명한다.
작품으로 돌아가자. ‘수분을 기다리는 수술 같기도, 샐쭉한 클리토리스 같기도’라는 표현은 무의미할까. ‘이것은 저것이다’라는 지시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뭘까. ‘이럴 수도’와 ‘저럴 수도’에 소환된 몇 가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감상이 시작되지 않을까. ‘Occupation’이라는 작품명에 대해서는 갈피를 못 잡겠지만 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작품을 보고 나면 매번 ‘난 읏도 모르고 떠드는 거야’하고 자조한다. 감상조차 자기옹호부터 시작하는 건 얼마나 가여운지! 미술 감상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을 때 스스로 되뇌었던 세 단어가 있다. 그냥, 자주, 공들여서. 아직은 ‘자주’의 단계다. 최초의 말은 반응이었다. 반응으로서의 글도 몇 편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이것인 것 같고, 저것인 것 같기도 해.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글쓰기.
그림 하나를 보고 이토록 길게 떠들다니. 과연 사람을 당기는 것으로 미술만 한 게 없다. ‘Occupation’의 동사형이 ‘Occupy’인 것을 고려하면, 머릿속에 이만큼 오래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일 자체가 미술의 Occupation 아닐까? 명확하지 않은 감상글도 이 점에서 의미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다고도모른다고도못하더라도 #레베카애크로이드 #rebeccaackroyd
레베카 애크로이드 《The Party is Woman》
2024.9.4 - 2024.10.27
페레스 프로젝트
image: 레베카 애크로이드, 'Occupation(2024)'
관람일자: 2024. 10. 18
발행일자: 2024.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