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의 <No.16>에서 멈추기
한남동 페이스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이우환 & 마크 로스코 《Correspondence》전시를 봤다. 촬영은 불가했다. 눈으로 담아야 했다. 눈과 마음으로밖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마크 로스코의 <Untitled(Brown on Red)>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듯하게 각진 크림슨 레드와 중앙에 벌어진 입 마냥 정방형으로 칠해진 브라운. 1:1로 맞춰진 비율이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절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Untitled(No.5)>는 그 같은 절망이 밤에는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준다. 낮에는 햇빛을 받아 강렬한 절망으로 발화하던 마음은 해가 가시면 더는 장작조차 되지 못하는 축축한 브라운으로, 한낮의 브라운은 다 타들어간 숯 같은 검정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앞선 두 작품보다 한 해 일찍 작업된 또 다른 <Untitled>은 처음의 빨강과는 달랐다. 한 번 다 타들어간 레드와 발광하는 크림슨 레드는 위아래로 1:2 비율로 자리했다. 외곽선은 불에 태운 종이 귀퉁이처럼 거칠었다. 고동색으로 처리된 가장자리는 여전히 가열차게 싸우고 있는 내부의 감정을 애써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처럼 읽혔다. 치열한 애증과 겉으로나마 내색하지 않으려는 고목나무 같은 색. 타오르는 슬픔을 안으로 삼키는 그림이었다.
4번째에 위치한 작품 <No.16>은 마음의 연한 구석을 건드렸다. 새순을 닮은 연녹색과 눅눅함이 느껴지는 올리브 그린이 병존하는 그림. 미묘한 차이지만 아래의 연녹빛이 가로가 넓은 직사각형으로 앉아있는 데 반해 위쪽의 그린은 가로세로 비가 애매하다. 위아래로 급하게 덧칠한 흰색 물감은 번져가는 부정적 감정을 덮어보려고 한 흔적이다. 하얀 붓터치는 우울을 막으려고 급히 쌓은 둑. 그 와중에 귀퉁이를 비집고 나온 핑크는 막연한 낙관을, 흰색과 딥그린 사이 맑은 초록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긍정을 내비친다.
No.16을 보자마자 아가미를 얻은 것만 같았다. 뭍에서만 살다가 갑자기 늪으로 떨어졌다. 허파에 흙이 들이찼다. 진흙을 토하려고 애쓰던 중이었다. 햇살에 뺨을 내주던 금빛 잔디 위에 토사물 같은 진흙이 쏟아진다. 눅진한 늪이 입안에 들이찬다. 숨쉬는 법을 몰라 허덕이다가 피부를 겨우 사용한다. 목덜미 근처에는 아가미가 움튼다. 허파는 줄어든다. 허파의 해면이 조금씩 축소된다. 그리움과 원망에 피부는 끈적거린다. 여기서 살려면 그리움은 기본. 너를 향한 축축한 감정은 적어도 물과 뭍을 오가는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주된 감정은 앞 모를 미래에 대한 막막함과 견뎌야 하는 먹먹함, 그러나 터뜨릴 수도 없는 갑갑함일 테다. 그 밑에 짙게 깔린 건 마음에 산들거리는 여린 잎의 추억 같은 나날일 테지. 발밑에 채이는 여름날과 그 위를 짓누르는 갈피 잃은 감정. 무언가를 상실한 직후 본 로스코의 그림은 밤낮으로 들이차는 감정들과 호흡하는 법을 알려줬다.
내 감상은 <No.16>에서 끝난다. 그다음은 모르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안다고도모른다고도못하더라도
#마크로스코 #markrothko
이우환 & 마크 로스코 《Correspondence》
2024.9.4 - 2024.10.26
페이스 갤러리
(표제 image: Mark Rothko, No. 16 {Green, White, Yellow on Yellow}, 1951, oil on canvas, 67-5/8" × 44-5/8" (171.8 cm × 113.3 cm), 출처: 페이스 갤러리
관람일자: 2024. 10. 11
발행일자: 202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