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불헛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궁금한 민지 Nov 23. 2024

백팩을 메고 싶은 내게 부동산은 너무 무겁다

영화 <소공녀>를 보고 골몰한 인생의 레버리지

*해당 글은 ‘자본주의 연속극(가제)’ 시리즈의 일부로 부정기 연재 예정입니다.


백팩을 사고 싶다. 1년에  번쯤 찾아오는 욕구. 대개 백팩을 사고 싶을 때는 한껏 자유로워지고 싶은 맘이 치솟는 시기다. W컨셉에서 1,392개에 달하는 백팩을 롤링한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여정이  길다.


넷플연가에서 미술 모임을 신청했다. 나를 소개하는 3가지가 필요하단다. 라떼, 대화, 관능이라고 답했다. 뒤의 두 가지는 무형의 것이지만, 살아있다는 감각을 준다는 점에서 미소의 목록과 다르지 않다. 미소를 살게끔 하는 것은 생의 수단이자 그녀 자체였다.  




Ⅰ.

영화 <소공녀>를 4회차 봤다. 이 영화는 나의 근원적인 공포를 가리킨다. 홈리스. 길바닥에 나앉은 적도 없으면서 간에 붙어있는 두려움. 영화를 보며 생각한다. 누군가를 자신을 먹여살리는 일과 자신을 살게끔 하는 것을. 그것을 통해 도출되는 자신의 존재를. 미소는 타인의 거처를 치움으로써 자신을 먹이고, 담배와 위스키와 애인을 통해 삶을 감각한다.  


미소의 친구들은 총 5명이다. 서울 중구에 본사가 위치한 대기업에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영. 아기자기한 회사 휴게실에는 몸을 누일 수 있는 귀여운 동굴이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셀프로 링거를 꽂고 수액을 주입한다. 미소와 이야기하는 15분 남짓한 시간 과장님의 연락을 받는다. 그녀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혼재돼 있다. 친구의 부탁과 수액, 과장님의 업무 전화. 추후 친구 아버지 장례식에서 내민 청첩장까지.  


현정은 남편과 시부모집에 산다. 키보드는 잘 치지만 요리를 못하는 그녀는 가족 구성원이 말없이 물을 더 부어야 하는 짠 국을 만들며 하루를 시작한다. 펑키한 옷차림과 선명한 립스틱이 어울리지만 그녀의 디폴트 차림은 잔잔한 꽃무늬 앞치마. 시험공부가 벼슬인 줄 아는 남편과 그녀는 서로를 무시하는 말을 내뱉고, 방음처리 안 되는 방에서 잠든다. 정작 잘 때는 뱉지 못한 말이라도 토해내려는 듯 입을 벌린 채로.


록이는 외동아들로 젊은 여자 손님이 오면 거한 저녁상을 차리는 부모님과 산다. 드레스룸이자 손님방은 손님에 따라 고추를 말리는 창고로 교묘하게 둔갑한다. 나가서 담배를 피우겠다는 미소에게 록의 엄마는 재떨이를 내민다. 결국 록과 함께 혼수 이불이 깔린 방에 누운 미소. 록은 “갈 데도 없는 것” 같은 미소에게 “결혼할래”라고 묻는다. 친구의 하룻밤 재워달라는 부탁을 무례할 권리로 치환하면서.


대용은 여자와 결혼했다. 몇 달 뒤 여자는 떠났다. 그는 자신이 먹은 컵라면조차도 치우지 못한다. 퇴근하면 방에 틀어박히는 대용은 대화를 시도하려는 미소를 대면하는 일조차 힘들어한다. 아파트 아파트, 노래 부르던 여자 때문에 매매한 아파트는 20년 대출이라는 족쇄로 돌아온다. 대용은 월급 190만 원에 다달이 원금과 이자를 100만 원씩 내며 손님방에서 운다. 날이 밝으면 누구보다 멀끔한 회사원의 얼굴로.


정미는 남자와 결혼했다. 평창동 혹은 한남동으로 추정되는, 단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도 높은 집. 정미의 특징은 상황을 막론한 과도한 ‘깔깔웃음’이다. 남편 옆에서는 입술이 1mm 올라간 피에로 미소를 짓지만 말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다단계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미소가 고맙다. 많은 방 중 하나를 내어준 이유일 테다. 하지만 물리적 공간은 내어줘도, 침묵이 중심인 가정의 규율을 깨뜨리는 일은 허용할 수 없다.


미소는 어떤가. 그녀의 삶은 자유로운 새와 같다. 담배, 위스키, 애인은 유동하는 삶과 조응한다. 그녀는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 공원에서 저 공원으로 옮겨다니는 새의 삶을 산다. 그녀의 삶에는 레버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거야.” 그녀의 인생은 현존하는 그녀의 몸에서 숨쉰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혹은 지구 반대편에도 없다.

영화 <소공녀> 스틸컷



Ⅱ.

자본주의에서 대출은 미래의 소득을 현재의 자산으로 바꾸는 행위.[1] 하지만 미래란 어디 있는가?



Ⅰ- 2.

자본주의에서 레버리지는 대출로 대표된다. 하지만 단순히 대출만이 레버리지는 아니다.경제학에서는 타인의 자본을 활용해 내 자본의 이익을 높인다는 뜻으로 쓰인단다. 개인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든, 기업이 대규모 마케팅을 집행하기 위해 대행사에 외주를 주든, 1인 기업이 세무사를 한시적으로 고용하든 다 레버리지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인생에선? 


5명의 친구들. 이들의 삶에는 분리와 분절이 자리한다. 문영은 원하는 바를 이룩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알뜰하게 짜 맞춘다. 레고 블록 같은 삶이다. 친구의 조사에는 자신의 경사를 끼얹는다. 간격이 필요한 일들이 만원 버스 마냥 붙어있다. 상대의 처지를 선 넘는 요구로 응수하는 록도 비슷하다. 문영과 록에게는 타인에게 지켜야 할 거리가 없다. 감정의 영역 대부분을 바깥으로 밀어 버렸으니까. 이들에게 남은 것은 무례함 뿐이다.


현정과 정미는 반대항 같지만 닮았다. 현정은 집안에서 남편을 무시하는 말을 서스럼없이 한다. 정미는 대궐 같은 집을 마련해준 남편에 대해 무언의 미소로 일관한다. 둘에게 젊은 날의 열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들은 자신의 일부를 잊어버리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묵살한다. 오늘 같을 내일을 선택함으로써 레버리지를 쓰지 않는 길을 택한다. 그녀들의 삶에는 리스크를 감수할 때만 따라오는 역동성이 제거돼 있다.


대용이는 글쎄. 증발해버린 아내 탓에 히키코모리가 된 그를 질타하고 싶진 않다. 2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이지만, 마냥 종속된 굴레는 아님은 알겠지. 비과세 혜택을 받는 시점에서 신혼집을 매도하고, 다른 주택을 매수하고 대출도 갈아타도 된다는 것을. 다만 190만 원 중 100만 원이 원리금인 그가 레버리지를 쓰겠다고 결심할 때 당초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어깨에 앉은 레버리지가 지나치게 무겁다.  


사우디로 발령이 났다는 한솔의 말은 미소에게 <시공간의 레버리지를 동시에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너와 함께 할 2년을 생명수당을 더한 근로소득으로 맞바꾸고, 매일 보는 얼굴을 반년에 한 번 보겠다는 공표. 담배와 위스키, 애인이 삶 자체인 미소에게 한솔과의 물리적 거리와 시차는 감히 벌릴 수 없는 무언가다. 오늘 쉴 숨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없다. 미소에게 한솔의 선언은 그런 것이었고, 레버리지에 대한 가치관에서 둘은 함께할 수 없었을 거다.


모든 삶에는 레버리지가 존재한다. ‘오늘 같은 인생’을 바라지 않는 사람 누구나 레버리지를 쓴다. 더 많은 현금흐름을, 더 많은 실물자산을, 더 많은 사적 시간을, 더 높은 업무 효율성을, 더 큰 명예와 예술적 성취를 위하여. 인생의 어떤 영역에의 헌신을 얼마나 높은 강도로, 얼마나 오래 감내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리스크를 감수한다. 이로 인해 잃을지도 모르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영화 <소공녀> 스틸컷
영화 <소공녀> 스틸컷


Ⅱ – 2.

인생에서의 레버리지를 한 줄로 표현하자면 원하는 인생 그림과의 시차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지에 대한 질문이다. 곧 레버리지를 향한 태도가 인생 가치관이다. 당장 애인에게 물어보자. (난 없다) 2년간 나 사우디로 발령가면 어때? 2년 뒤엔 5천만 원을 들고 돌아올 거야! 페이스톡도 있잖아? 둘이 합친 월급 중 300만 원을 아파트 대출금으로 갚는 것 어때? 20년 뒤엔 우리집이 될 걸!


(문영과 록은 타인을 향한 몰염치를 선택함으로써 감정을 외주화했고, 자기 인생에 대해 함구하는 현정과 정미는 레버리지를 쓰는 것을 포기했기에 논의에서 배제한다)



Ⅱ – 3.

버크셔 해서웨이를 이끄는 워렌 버핏은 2023년 기준 1,076억 달러(150조원)를 순자산으로 가졌다. 같은 해 연간 재무제표에는 499억 달러(69조원)이 부채로 잡힌다. 우리나라 국민의 자산의 80%는 부동산이다. 2023년 3월 기준 가구당 평균 자산 5억 2727만 원 중 부채는 9,186만 원이다. 가구당 평균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빚은 자산의 20% 수준이니 나쁘지 않다.


언제나 궁금했다. 빚 없는 부자가 있을까?


언젠가 회계를 하는 친구가 ‘부채도 자산이야’라고 했다. 막 자본주의에 눈을 뜬 시점이라 알아는 들었지만, 빚이 자산이라는 게 이상했다.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거나 최소한 등이 따땃한 느낌이 들어야 재산[2] 아닌가? (아직까지 대출 한 번 받은 적 없는 나는 대출 하면 장판이 서늘해지는 기분부터 든다)


          

Ⅲ.

유튜브 <요즘 것들의 사생활>에 나온, 책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를 쓴 정지우 작가는 자기계발서를 읽던 8개월 차에 그 같은 독서를 그만뒀다고 밝힌다. 자기계발서에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돌봄과 오늘 하루의 평온을 누리는 일에 대한 얘기가 없다고 말이다. 모든 것을 자동수익과 순자산 몇 억을 이루는 시점으로 유예하는 삶.


2021년 부동산의 미친 폭등기에 자산시장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재개발을 앞둔 지역에 어설픈 임장을 몇 번 갔다. 이제는 자본의 축적에 경도된 광신도에서 자본주의를 파악하고, 삶의 복잡성을 이해한다. 삶 자체가 레버리지의 문제다. 삶에서 내가 감내할 레버리지와 그렇지 않을 레버리지에 대해 생각한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와 전시장에 가기로 한 우정의 교류는 오늘 내가 쓰기로 했던 글 한 편과 어떻게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동생과 함께 먹기로 한 떡볶이와 커리어에 영향을 미칠 비즈니스 저녁 식사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오늘 나는 무엇을 참아내고, 내일 무엇을 얻을 것인가. 혹은 얻지 못할 것인가. 이 같은 선택 하나하나가 사슬처럼 엮여 인생을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거대한 블록체인일지도 모른다. 저장된 직후에는 자신도 풀 수 없는 암호화된 기록.




백팩을 사고 싶은 마음이 보름째 이어진다. 새처럼 살고 싶다. 날고 싶다. 2개월 만에 찾은 자유를 더 누비고 싶다. 어느 지친 날 낯선 나무 밑동에 비틀거리며 착륙하더라도, 한동안은 더 가볍고 싶다. 안정적인 소득을 포기하고, 모아둔 현금을 축내면서 조금 더 날아간다. 날갯짓의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혹은 비상을 향한 심장이 식기까지.


담배와 위스키 대신 집을 놓은 미소는 꿈과 자신을 레버리지의 영역으로 밀어넣은 한솔까지 잃게 된다. 라떼와 대화와 관능이 삶의 목록인 나는 미소와 닮아있지만, 미소처럼은 살 수가 없다. 커피를 마실 6천 원과 삶의 괴로움과 웃음을 공유할 우정 어린 대화와 사랑을 나눌 누군가와 나란히 몸을 누이는 공간이 필요하다. 사흘을 참은 라떼, 일주일을 미룬 대화, 몇 달을 유예한 사랑은 빛바랜 삶이다.



I live by ___________.
 I am __________.

살기 위해 스스로 소외시켜야 하는 내 일부와  
삶 자체이자 내가 살아가는 것.
 
 
나에겐 라떼와 대화와 사랑을 나눌 거처가 필요하다.
나는 그 같은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을까.

당분간은 백팩을 메고 다니려고 한다. 당분간은.


영화 <소공녀> 스틸컷



[1] 부동산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 (재테크불변의 법칙, 아기곰), 조선일보 머니 youtube

[2] 법률 동산, 부동산 외에 금전적 가치를 지니는 권리 및 의무의 총체. 적극적 재산인 자산 이외에 소극적 재산인 부채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