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다 해 주겠다는 구슬림이 혁신이었나
전 국민을 CEO로 만들려는 이재명 정부. 정부 탓만 하기엔 시대착오적이다. 세계적 조류가 그러한 걸 대통령이라고 어째. 노동자 라벨을 달고 평생 살아가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CEO가 되어야 하는 세상에 의문을 던진다. 왜 그래야 하지?
세상은 사업가를 칭송한다. 그들은 대중이 미처 감지하지 못한 문제를 발굴해 개념화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고안한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나도 사업가가 되고 싶기에. 하지만 동시에 생각한다. 모든 것을 외주 맡는 일이 언제부터 혁신가의 일이었나? 세상 문제만을 찾아다니는 시선이 장려 대상인가? 그러한 귀결은 왜 언제나 ‘내가 떠 먹여줄게’인가? 스스로 문제를 만들도록 유도할 순 없는 건가?
자기가 몰입하던 분야만 잘 나가면 그만. 혁신가란 등신 같다.
혁신이란 기존에 사람들이 자기효능감을 느끼던 방식을 소거하는 것이다.
이사 온 지 28일째. 이사 전 집을 알아보며 다니기 직전, 연수동에서 종로3가까지 출퇴근하며 날마다 당혹감과 함께 눈을 뜨던 시절을 돌이킨다. 길에서 보내는 3시간 30분. 도어투도어로 편도 30분에 집을 구한다 치면 벌게 되는 2시간 30분. 어떻게 쓸래? 월세가 나가는 만큼 착실하게 시간 쓸 자신 있어? 마음으로만 치면 지난 한 해 구직 고민을 종결시켜준 회사에 복속해 콘텐츠 연구를 하고, 지난해부터 본격 몰입하게 된 거시경제를 주변에 읊을 정도로 이해하고…
멈춘다. 간과한 게 있다는 것을. 자취로 인해 새로 생성되는 집안일의 시간을. 상기한다. 지난 1년간 몸에 밴 지키고 싶은 습관을. 직전 회사는 야근이 잦았다. 밤 9시, 야근 식대에 기대어 먹던 값비싼 배달음식에 환멸을 느꼈다. 1년을 채 채우지 않고 퇴사한 10월, 휴식과 간헐적 구직을 겸한 1년 동안 일상에 요리라는 행위를 더했다. 이전에 요리란 주방장인 엄마가 집을 비우던 때만 간헐적으로 벌이던 이벤트였으나, 부모님이 시골집에 머무는 기간이 한 달에 절반을 차지하면서 부엌을 넘보는 일이 어렵지 않아졌다. 수저나 들고 내려놓는 일만 하던 손에 칼과 국자가 들렸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5시간 정도 읽거나 쓰는 낮이 지나면 저녁에는 칼을 들고 부엌에 섰다. 해가 내려앉지 않는 여름. 아이스 라떼 한 잔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마트에 들렀다. 주변에서는 쿠팡의 편함과 컬리의 유익함을 말했지만 이대로의 불편이 뭔지 모르는 나는 동네 마트에서 물성을 지닌 채소와 육류와 해조류를 보며 랩에 싸인 버섯의 신선도를, 미국산 돼지고기 안심과 국내산 돼지고기 안심의 g당 가격을, 외국산 밀이 들어간 트랜스지방 덩어리의 과자 박스를 들여다 보며 장바구니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길 썩 흥미로워했다.
그렇게 열 두 달이 지나고, 나는 곧잘 요리하는 사람이 됐다.
목숨을 걸 만큼 해야 하는 일도, 좋아하는 일도 없다.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할 말은 많아서 글은 쓰는 편이다. 그마저도 사는 일보다 글이 급할 순 없다. 글 대부분은 살다가 열받아서, 살다가 기가 차서 따라오는 말들이다. 그러니까, 사는 일이 먼저라는 거다. 삶을 먹고사니즘으로 해석하든, 자기만의 가치관을 관철하는 투쟁으로 여기든 글이 삶을 앞지를 수는 없다.
하물며 일이라. 사람은 사회구성원으로, 좁게는 가족과 친구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교류하기 위해서 일한다. 지금의 ‘일(labor)’은 과거에는 공동체에서 한 사람 몫을 했다는 기여도를 인정해주는 불특정한 행위의 집합이었을 거다. 그건 다 먹고 치운 동물의 뼈 조각을 말끔하게 묻거나, 급격한 기상 악화에 뭐라도 피할 구석을 만드는 재주였거나, 자지러지는 아이를 제 어미보다도 순식간에 달래는 손길 그 <무엇들>이었을 거다. 현대에 와서 ‘그러한 불특정 행위 모음’이 가스검침공이니, 기상 캐스터니, 피부과 코디네이터 등 한 쪽에 쏠린 예각의 이름이 되었을 뿐.
혁신은 무두질을 해 평평하게 편 가죽을 의미한다. 3차원에 살아 움직이던 동물의 가죽은 2차원으로 변모하며 완전히 새로워진다. 그러니까 혁신은 일종의 새로운 상태로의 탈바꿈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혁신은 기존에 사람들이 자기효능감을 느끼던 방식을 앗아가는 일이라고. 혁신가는 자기가 골몰하는 문제의 해결로 인해 다른 무엇들이 절멸해도 상관 없는 사람들이다.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를 볼까.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던 금융맨인 그는 인터넷 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올라타 온라인에서 팔기 적합한 상품을 리스트업했다. 규격화된 형태와 크기를 지닌 책은 물류 최적화에 적합한 컨디션. 반스앤노블 같은 큰 대형서점도 들일 수 있는 재고가 15만 권인데 반해 무제한에 가깝게 책을 입고할 수 있는 온라인 서점이라니. 사람들은 ‘편하다’는 이유로 이를 이용한다. 그걸 마케팅에서는 미충족욕구라고 부른다지. 미처 몰랐던 불편함을 메우는 편안함. 음, 미충족욕구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한 것 같다.
일론 머스크는 어떤가. 그는 지구에 발 딛고 있으면서 지구를 백데이터 삼을 생각이다. 화성을 지구의 확장 SD 카드 쯤으로 여기는 것.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다분히 현실로 만드는 적극성은 찬탄할 만하다. 하지만 묻고 싶다. 이 땅을 사랑할 수는 없나? 지구의 멸망 이후를 꿈꾸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낙관인가?
<특이점이 온다>로 잘 알려진, 구글의 엔지니어였고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의 대담을 본다. 그는 나노봇이 들어있는 알약 하나를 삼켜 ‘제2의 혈액’을 심음으로써 현재보다 백만 배 강력한 지식을 지닐 수 있다고 여긴다.1) 그의 예측은 하나씩 실현되는 듯하다. 구글은 알파고로 바둑계를 뒤흔든 뒤 유유히 신약 개발에 나섰다. 우리는 엄청 똑똑해지고, 영생을 살아야 하니까. 이 모든 기술의 지향점은 가장 최선의 나 만들기.
문득 생각했다.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은 낙관주의자’. 솔직히 얘기해보자. 그들이 말하는 혁신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 자신의 생존 방식을 바꿀 획기적 수익에의 열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을 살고 싶은 욕심에서 나왔다. 그러한 욕망은 세련된 마케팅의 언어를 입고 혁신으로 표현된다. 짐승의 외피에서 평평하게 무두질한 가죽이 되는 혁신. 하지만 본디 그 옷을 입고 있던 사람들은 과연 혁신을 원했을까?
당장 사라져도 나를 울릴 것이 없다면 미래만을 꿈꿀 수 있다. 잃을 것 자체가 없으니까. 자신의 혁신으로 인해 아끼는 이들이 낙담하거나, 좌절하거나, 고꾸라져 일어나지 못해도 상관 없다. 그의 주변에는 불굴의 정신들이 가득하다. 그는 마음껏 꿈꾼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박살나도록. 혁신가의 세계에는 오로지 자신이 정의(justice)내린 정의(definition)만이 존재한다.
오늘도 요리를 한다. 자기효능감을 느끼는 이 오래된 방식을 나는 결코 내어주지 않고 싶다. 생산성 혁명을 부르짖는 때, 기어코 도마 앞에 서서 직접 사온 식료품을 꺼내놓는다. 랩을 벗기고 미끈하고 기름진 닭 가죽을 만진다. 흙이 뭍은 양파를 망에서 꺼낸다. 세상은 말한다. 너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입만 벌리면 된다고. 식료품 가격과 신선도, 원산지 비교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을 한데 취급하는 마트, 원물에 묻은 흙을 털고 핏물을 빼내고 뿌리를 정돈할 필요 없이 나 대신 요리해 주는 가게, 나 대신 요리한 음식을 배달해주는 사람까지. 혁신이라고 이름 붙인 일들이 그런 수준이다. 나는 종국에 인류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부처님 자세로 똬리 틀고 앉아서 먹지도 싸지도 않은 채 머릿속 비상한 생각을 구현하는 양자 컴퓨터 자체가 되길 꿈꾸는 것 같다.
제자리에 앉아 1겁의 시간을 통달한 존재되기. 그게 뭐, 어쩌란 말인가?
1) Youtube 사이언스 아담, 일론 머스크의 유일한 스승: 빅테크가 숨긴 설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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