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빚지는 주제에 무심했던 것들

몸의 감각에 대하여

by 궁금한 민지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스틸컷


장미 한 다발이면 기분도 화사해져

연습실에서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꽃을 파는 노점상이 있다. 사장님이 제철 맞은 꽃만 가져다 두시는지, 매번 지나는 길임에도 시선을 뺏긴다. 며칠 전에는 샛노란 장미에 눈길이 고정됐다. 솔직히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뺀 채 걷다가 발밑의 요철을 보지 못했다. 발가락이 꺾이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른 뒤에야 시선을 돌렸다. 어쩌겠는가. 목석이 아니고서야 고운 꽃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덧 손에는 노란 장미 한 다발이 들려있었다.




망가지고서야 겨우 알았어


지난가을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수영장을 갔다. 오랜만에 운동했다는 기쁨은 잠시, 수영 도중 막힌 귀는 샤워실을 나와서도 막혀 있었다. ‘이러다 말겠지’하고 무심하게 귀를 털었다.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최대한 벌려도 보았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도 지나갔다. 사흘째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귓밥 탓이라 짐작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열세 살쯤 물놀이를 갔다가 같은 증상으로 이비인후과를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의사 선생님이 꺼낸 ‘왕귓밥’에 수치심을 느꼈었지.

의사는 “완전히 막혔네”라며 눈썹을 축 가라앉혔다. 사진 속 귀엔 고막이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강도가 셌다. 그는 염증이 꽤 진행된 거라면서 외이도염이라고 했다. “잘 안 들리지 않았어요?” 말을 잇지 못한 채 멍청히 앉아있었다.




사소한 아픔이 중요한 이유


주중 최소 사흘은 피아노 연습실로 간다. 귀 한쪽이 꽉 막힌 뒤에야 연습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음을 예민하게 들을 수 없었다. 360도 서라운드로 들리던 소리가 좁게 들리고, 세심도도 떨어지니 그럴 수밖에.

의사는 오른쪽 귀는 물론 왼쪽 귀도 약하지만 염증이 있다고 전했다. 충격적인 점은 오른쪽 귀의 거대 귓밥을 꺼내고 나니 왼쪽 귀가 덜 들렸다는 것이었다. 왼쪽도 청력이 나빠졌던 것. 매일 음악을 듣고, 대화하는데 이렇게 둔하다니.

중학교 생물 수업 교과서에 그려진 삽화를 떠올린다. 손이 아주 큰 남자 그림. 옆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의 위험’이라고 쓰여있었다. 안 아프면 좋은 거 아닌가? 자문하던 순간 선생님은 위험에 대처하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스틸컷




아끼는 감각을 돌이키기


책방과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의 분위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성치 못하다면 분위기도 만끽할 수 없다. 책방까지 걸어갈 다리, 종이 냄새를 맡는 코, 책의 사랑스러운 묵직함을 감지하는 감각….

고소한 커피 냄새를 맡는 것, 입술에 닿는 맥주의 하얀 거품과 목 넘김, 소낙비가 대차게 쏟아지는 소리와 이어 찾아오는 털이 곤두서는 서늘함, 사랑하는 이의 굴곡진 손을 꽉차게 잡아보는 촉감 모두 마찬가지다. 매 순간 몸에 쉼 없이 빚진다.

외이도는 여전히 별 차도가 없다. 소염제부터 항생제 대여섯 알을 보름째 넘기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사무실에서 후배가, 카페에서 친구가, 집에서 동생이 말할 때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

망가진 뒤에야 팔다리가, 눈동자가, 뺨이, 등허리가 묵묵히 나를 도와주고 있었구나, 하고 후회하지 말아야지. 스트레칭도 하고, 먼 하늘도 바라보고, 밤공기 들이마시며 산책도 하고. 몸의 감각을 한껏 누리며, 돌보며 살아야겠다.

영화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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