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2인극이 아니라, 모노드라마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관객이다

by 궁금한 민지

입이 있으나 말하질 못해


언제부턴가 회사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대화에 자신감이 떨어졌다. 나의 단점은 무수하다. 친구들이 추억을 회상할 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네가 그때 집에서 만들어준 파스타, 진짜 맛있었는데” “...?”),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 (“요즘처럼 선거철일 때 미리 표심 알아보는 거 있잖아” “...여론조사?”) 등 순탄한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다량 보유 중이다. 하지만 대화에 위축된 주요한 원인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낮은 공감력이었다. 공감력이 뒤떨어지는 대신 분석하길 좋아한다. 낮은 공감력을 이성을 통한 이해로 보완하려는 심리일지도 모른다. 항상 심리테스트를 하면 탐구가 성향이 나온다. “왜 그런 것 같아?” 상대에게 따져 물으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런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배경이 궁금한 것이다. 자신에게도 적용한다. ‘난 그때 왜 화가 났을까.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러나 상대가 문자 그대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면 이 같은 태도는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상대도 마음이 왜 이런지 알고 싶을지라도, 이런 대화는 긴 시간, 이왕이면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충분할 때나 가능하다. 여러 이유로 나는 마음의 기원을 파고드는 습관을 감추게 됐고, ‘그랬구나’ 혹은 무언의 고갯짓만 이어갔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스틸컷


아는대로 마음먹을 수 있으면, 신선이게


말없이 끄덕이다가 답답하면 분석하는 습관으로 회귀한다. 사실 분석은 제대로 이뤄지더라도 직관적인 공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허점투성이인 분석은 상대방의 뜻을 왜곡한다. 문제점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7살 차의 연상연하 커플인 언니가 결혼을 두고 남자친구와 부딪쳐 힘들다고 털어놨다. 언니의 남자친구에게 결혼은 먼 이야기였다. 사랑의 확장판이 되어야 하는 결혼이 오히려 관계에 협곡을 만들었다. “결혼이 만남의 지속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된 것 같아.” 언니는 “그러게”라고 짧은 탄식을 뱉었다. 자리에는 나보다 어린 동생도 있었다. 그는 자리가 파한 뒤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기를 낳고 싶다면 나이를 고려해야 하니까, 당연한 고민 아닐까요.” 아차 싶었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스틸컷


이런 일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회사 서너 군데에 이력서를 넣어둔 친구는 채용 마감이 임박했으나 연락이 오지 않자 좌절했다. 나는 아직 진행 중인 공고에 회신이 없다고 지레 주눅 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A에게 “아직 마감까지 시일이 남았잖아. 우리 회사도 업무가 많을 때는 마감날 한 번에 열어보고 적당한 사람한테 연락하는걸. 미리 실망하지 마” 그러자 B가 말했다. “안다고 마음이 그렇게 되나.” 내가 뱉은 말은 바짝 마른 화분을 두고 허공에 물을 뿌리는 격이었다.




“그랬구나”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들

“그랬구나”를 연거푸 하고 나면,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쳐든다. 엄밀히 보면 고민하는 상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우리는 안다. 상황을 헤쳐나갈 사람은 당사자뿐이고, 주변 사람은 경기의 흐름을 지켜보거나 가끔 두 팔을 흔들며 응원할 뿐임을.


유일한 미션은 드라마에 몰입하는 시청자가 되는 것이다. “그랬구나”가 맥없이 느껴진다면, 레퍼토리를 늘려보자. 회의에서 의견을 지나치게 피력한 것 같아 후회하는 친구를 가정하자. ①“그래서?”는 이어질 장면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개입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끌어낸다. 상대방-발화자는 추진력을 얻는다. “그래서 선배한테 ‘저 너무 나댔나요’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셨어.”


②“~했겠다”는 심정적인 추측이다. 사건의 객관적인 분석은 묶어둔 채 당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찝찝했겠다” “찝찝했지. 그날 내내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 ③“어떡하냐”도 있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유발한다. “에휴, 나도 모르겠다”, 혹은 “다음번 회의 때는 다른 팀원 의견을 더 들어보려고”라며 감정을 추스르고 자구책을 찾게 한다.


공통점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의 손에 들린 연필을 뺏지 말자. 섣부른 조언은 밑그림을 그리는데 색칠하겠다고 물감을 들이대거나, 혹은 밑그림이 이상하다며 지우려는 행동과 다름없다.




지금도 카페에선, 모노드라마가 상연 중

일상적인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말하는 비율이 5:5로 똑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의제가 뚜렷한 토론이나 토의가 아니고서야 발언은 균등하게 할당되지 않는다. 혼자 카페에 30분만 앉아 옆자리 들어보자. 어젯밤 썸남이 보낸 문자에 마음이 어땠는지, 새로 옮겨간 회사의 분위기가 어떻게 다른지, 청소를 안 하는 동생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등 주제는 다양하지만, 대개 한 쪽이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대화는 2인극이 아니다. ‘나’가 주인공인 모노드라마다. 그리고 모노드라마에 필요한 것은 다른 배우가 아니라, 주의력 높은 관객이다.


구월동의 한 카페에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린다. 그는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피식 웃었다. “다들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해소할 구멍이 필요한 거야. 카페가 있는 이유지!” 영화를 볼 때처럼 대화에 임해보자. 관객은 2시간 동안 스크린에 상영되는 이야기를 주시한 뒤에야 말할 권리를 얻는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필요한 것은 애정 있는 관객임을 받아들이자. 이렇게 오늘도 팝콘 대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친구의 드라마를 보러 간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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