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기 버튼이 없는 사람의 변명
3개월 만에 만나는 친구는 아주 맛있는 샹그리아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샹그리아. 문득 최근에 맛본 샹그리아가 떠올랐다. 짙은 계피향 덕에 진득함까지 느껴졌던 맛. 문제는 맛 외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근 한 달 내의 일인데 누구와 어떤 식당에서 마셨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에게 ‘잠깐만’이라고 카톡을 남긴 뒤 상위 10개 대화창의 앨범을 뒤졌다. 사촌 동생과의 대화창에서 어둑어둑한 붉은 조명의 스페인 식당 안에 먹물 빠에야와 샹그리아 잔을 든 채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여기다! 사진은 물고기가 잔뜩 낚인 그물을 끌어 올리듯 그날의 장면을 줄줄이 이어지게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휴가를 맞춰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을 열흘 앞둔 토요일, 우리는 합정의 한 플라워 카페에서 회합했다. 싱그러운 향이 가득한 공간과 달리 우리의 혈관은 각자 전날 마신 알코올의 여파로 혼탁했다. 또 마시면 인간이 아니지, 되뇌면서 놀러 갈 때까지만이라도 금주하자고 단결했다.
이튿날, 동호회에서 알게 된 J를 1년 만에 만났다. 친구는 친구지만, 한때 마음이 있었던 터라 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끈적한 공기 탓에 팔다리에는 곧 지느러미가 돋아날 기세였다. 축축 처지는 몸을 끌고 호프집 문을 젖히자마자 직원에게 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다. 자정까지 클라우드 한 잔으로 턱이 빠지도록 떠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친구 B의 전화를 받았다. 뭐해, 라는 질문에 맥주 마셨어! 라고 쾌활하게 외쳤다. B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번뜩 약속이 스쳤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였다고 변명을 시작했지만, 이내 약속을 잊었노라고 수그렸다.
입술과 샹그리아가 접촉하는 순간만큼은 지상에 나와 샹그리아만 남았던 걸까. 음료를 마신 기억은 나는데 정말 맛만 생생하다. 친구의 전화에 한 치 망설임 없이 술 마셨다고 명랑하게 외치는 내겐 의식이라는 게 없는 걸까. 여행을 앞두고 컨디션을 염려하던 마음은 한껏 늘어진 땀구멍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자신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열등한 기억력은 현재 진행형인 성향 탓일지도 모른다. 내 시간은 ‘현재’의 연속이다. 유효한 것은 지금 속한 시공간뿐. 그저 오늘에 충실하다. ‘지금’을 재생하느라 ‘과거’를 되감기할 여력이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매일 다시 태어나는 세상에 살고 싶다. 지금에만 전념하면 핀잔들을 일도 없을 텐데. 하루를 영원처럼 살 자신도 있는데.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한 선배가 이사를 준비 중이라 바쁘다고 했다. 이사 가세요? 했더니 선배의 눈이 동그래진다. 민지 씨, 저번에 양꼬치 먹을 때 얘기했는데…. 아, 물론 이건 알코올 탓이다. 칭따오와 영원 같은 하루를 보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