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궁금한 민지 Feb 19. 2020

후원단체가 마케팅에 배워야 할 것

욕망은 끝이 없는데, 연민의 총량은 왜 정해져 있나

운동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집에 가던 길에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봉사자를 만났다. ‘국경 없는 의사회였다. 봉사자는 4가지 선택지를   의사들이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일지 물었다. “의료기기가 부족할  아닌가요?” 그는 아이들이 눈앞에서 죽어갈 때라고 답했다.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답지를 보고도 인프라 부족을 꼽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봉사자는 현지의 열악한 의료 상황을 설명하면서 후원금을 요청했지만, 유엔난민기구에 기부한다는 이유로 후원을 거절했다.

우스운 일이다. 난민기구에 내는 기존 삼만 원에 삼만 원이 더해진들 육만 원이다. 회사 근처 술집에서 안주  개를 시켜두고 소주  병을 연거푸 마시는 회식을 3차까지 마치면 4만 원 정도다.     마시면   있는 돈이다. 새삼 욕구 따라 사는 자신을 돌아봤다. 그뿐인가. 봄이 코앞이니 파스텔 니트로 옷장 분위기도 바꾸고 싶고, ‘물먹립 위한 워터틴트도 파우치에 쟁여야 한다. 욕망 앞에서 의료보험은 물론 병원도 없는 곳에서 사경을 헤매는 국경 밖의 아이는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벌을 위해서는 다음  카드값도 불사한다. 인스타그램에서  호텔 라운지에 열리는 파티는 세련된 이미지  컷으로 친구를 태그하게 만든다. 혹은 최소한 ‘위시리스트폴더에 저장된다. 유예하더라도 언젠가 손에 넣어야  대상이다. 블로그에서  파운데이션은 뷰티 커뮤니티에서 사용 후기를 정독한  매장에서 테스트를 해보고 구매한다. 옷은 쇼핑  지그재그에서 같은 색에 유사한 디자인을 한눈에 비교한  가장 저가의 제품을 물색한다. 제품 하나를 손에 넣는 경로는 까다로운 검증의 과정이다.
 
반면 선천적인 장애로 막대한 치료비와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4 아이가 언젠가 돕고 싶은 대상으로 남겨지는 경우는 드물다. 혹자는 후원 단체들의 거리 캠페인의 방법론을 높이 산다. 이들은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가벼운 요청으로 시작해 퀴즈에 참여하게 하고,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심리적 진입장벽을 낮춰  단계마다 잠재적 후원자의 이탈률을 줄인다. 그러나  명의 후원자 확보가  다른 후원자의 확산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안타깝다라는 찰나의 감상은 기부로 이어지지만,  메일함의 ‘읽지 않음상태로 쌓이는 뉴스레터로 전락한다.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아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은 다르다. 소비자는 구매내역을 통해 마일리지를 적립해 다음번 욕망을 기약하거나, 이용한 서비스를 SNS 인증하면서 ‘좋아요 인정 욕구를 채운다. ‘좋아요 누른 이들은 사진  라이프스타일을 열망한다. 업체들이 판매하는 물건과 서비스는 사람들의 욕망에 기대 자생력을 확보한다. 명품 백의 높은 가격은 패션 하우스의 유구한 역사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그를 열망하는 이들에 의해 좌우된다. “ 남자 멋지지 않니?”라는 친구의  마디에 무심하게 스친 사람도 돌아보는  사람이다. 욕망은 인간의 지속가능한 악이자 덕이다.




욕망과 연민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희구하고, 있어도  갈망하게 하는 욕망. 타인에게 부족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채워주려는 연민. 다른 점이 있다면, 연민은 뻗어 나가는 시혜적인 마음이고, 욕망은 끌어당기려는 결핍의 마음이다. 만약 연민을 욕망의 화법으로 바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욕망이 욕망을 부르는 것처럼, 전쟁과 가난, 기아가 있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연민이 도미노처럼 영향을 미쳐서 개선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아니, 결국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오로지 결핍뿐이 아닐까.

물질 얘기를 해보자. 원자에는 옥텟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원자는 레이어 모양으로 전자를 지니는데, 가장 바깥의 전자가 충분할 때에는 척력이 발생한다. 외부의 전자가 다가와도 밀어내고, 토해낸다. 반면 원자가 지닌 전자가 부족할 때에는 인력이 작용한다. 다른 전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케팅의 원리와 닮았다. 마케팅은 ‘부족함 자극해 욕망을 발현하도록 한다. 우리는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 위해 비용을 치른다. 그리고 연민은 상대가 아쉬워 보이는 경우에 발생한다.

역설적으로 내게 연민이 유효한 때는  자신도 <이대로는 충분치 않다>라고 느낄 때였다. 상대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지만, 나도  상태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다. 가령 코가 빨대로 막힌 바다거북 사진에 같은 생명으로서 괴로움을 느끼다가 연간 플라스틱 배출량을 찾아보고 문제의식을 느낄 때처럼. 연민이 욕망과 같을 수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민이 연쇄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광고가 뾰족한 타겟팅으로 소비자의 결핍감을 건드리고,  다른 보상을 제안하는 것처럼, 인간 본성의 취약한 지점을 찌르는 예리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기부가 순간의 측은지심에 그치지 않으려면,  선한 의도가 적재적소에 배치돼 발휘됐는지 따져봐야 한다. 분쟁 지역의 의사들이 힘든 순간은 아이들이 죽어갈 때인지 모르겠으나, 기부하는 입장이라면 기부액이  나가는 상황이어야 한다. 지난 1 EU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리비아에 보낸 난민 지원금이 난민을 착취하는 민병대에 흘러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누군가를 도우려고  돈이 엉뚱한 이의 배를 불리는데 쓰이지 않으려면,  집요하고 정확하게 연민해야 한다. 어쩌면 연민은 욕망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인상적이었던 발언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사람은 착하지 않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  이기심을 이용해 세상을 좋게 만드는 시스템으로 만드는  정말 현명하고 창의적인 사람이다.

-tvN <알쓸신잡>  건축가 유현준
 





**물론 옥텟 규칙은  깊게 들어가면 전자 개수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5년간 유엔난민기구에 기부했다. 기부액은 꾸준히 쌓였지만, 기부를 끝내는 시점에서는 처음 기부를 결심한 때의 연민과 문제의식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넷플릭스 자동결제처럼 매월 빠져나간 출금 내역으로 남았다. 기관 입장에서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것이 실패한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기부는 사람들이 지니는 찰나의 연민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