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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Apr 10. 2020

에디터와 알고리즘

주의력 결핍자의 직업

한 우물만 파기도 바쁜 세상에 뭐 하는 걸까

2월, M 살롱에 다녀왔다. 무용 전공자가 진행하는 클래식 발레를 주제로 한 살롱이었다. 해부학 교수부터 스트릿 댄스를 즐기는 미술 전공자, 취미 발레를 즐기는 문화예술 분야의 기자 지망생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다른 이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작품은 <백조의 호수>였다. 마리우스 쁘띠빠의 주문으로 차이코프스키가 발레곡을 작곡한 사실을 통해 음악이 무용보다 지위가 낮았다는 점부터 모네의 그림 속 무용수와 정장을 입은 남성들과의 관계, 한 무용 비평가가 말했다는 우아함에 대한 정의도 들었다.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한편 만족도와는 별개로, 이튿날에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피아노를 치고, 유튜브를 하겠다고 설치고, 발레도 수강하고, 속옷 디자인까지 배우겠다고 나선 마당인데, 없는 살림에 무용 모임까지 간 자신에 대한 회의였다. 하고 싶은 건 많고, 시간은 제한돼 있고! 왜 이렇게 다방면에 관심이 많을까. 그래 놓고 ‘피아노 연습을 못 했네’, ‘이번 달에도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했네’ 하고 자괴감을 가지니 무슨 자가당착인가. 친구한테 한탄했더니 ‘무한을 꿈꾸는 인간이라 그렇다’는 철학적인 말이 돌아왔다.




에디터와 알고리듬은 닮은꼴, 혹은

인스타그램 알고리듬은 나를 어떻게 무용 모임에 가도록 이끌었을까. 최근 신진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발레복 브랜드 계정을 팔로우했다. IGTV에 올라온 스위스인지 프랑스인지 어디 예술학교의 발레 클래스 영상도 시청했고. 말끔하게 머리를 올린 채 푸시아 핑크색 발레복을 입고 다리를 치켜드는 팅커벨 같은 10대 소녀의 모습에 ‘좋아요’를 눌렀더랬다. 알고리듬을 이러한 신호를 놓치지 않고 있다가 떡 하고 무용 모임을 보여준 것일 테고. 선히 보이는 수작에 당한 느낌이라 괜히 속이 끓었다.
 
최근까지 나의 직업은 에디터였다. 문득 에디팅과 알고리듬이 닮았다는 생각에 미쳤다. 복잡한 세상에서 무언가를 선취해 제안하는 행위는 둘의 공통점이다.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비칠 만한 것을 콕 집어서 쓱 내민다. 알고리듬의 적중률이 에디터의 적중률보다 높다는 건 데이터를 들여다볼 가치도 없이 자명하다. 독자 관심을 ‘낱낱이’ 기억하는 건 AI 전문이다. 다른 점은 무엇일까? 에디터는 종종 독자에게 ‘관심 없을지 몰라도, 너 이건 좀 봐봐’ 하고 무언가를 들이민다. 알고리듬은 절대적으로 독자의 관심에 따르지만, 때때로 에디터는 자신의 관심을 우선한다.
 
알고리듬은 독자의 관심사를 넓히기보다 좁게 강화한다. 낯선 게시물이 등장한들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들이다. 독자는 편향적인 취향을 지니게 된다. 그들은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기울어진 취향의 미끄럼틀을 타고 사선으로 끊임없이, 끝 모르게 내려간다. 한편 에디터는 확장성이 있다. 알고리듬과 성질이 다른 결정적인 지점이다. 낯선 사물이나 사건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는 것이 에디터의 핵심 자질이자 미덕인 이유다. 결국 에디터는 호기심이다. 그렇다면 무용 살롱에 간 결정은 알고리듬의 폐쇄성으로 인한 것일까, 에디터라는 직업의 개방성 덕분이었을까.



에디터라는 직업이 잘 맞았지만,
때로 신물이 났던 이유

에디터라는 직업을 갖게 된 데에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이것도 저것도 재미있어 보인다’라는 감상이 한몫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다 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병적인 게 아닐까. 세상 모든 일을 경험할 순 없고(특히 능숙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시간은 유한하다. 쉴 새 없이 사냥감을 쫓는 직업과 자아 저편에 숨겨진 관심사를 길어 올리는 시스템은 <대상은 무한하다>라는 전제로 움직인다. 무한한 세계에서 에디터는 모든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인스타그램을 헤매는 자아는 ‘어쩌면 내 것 일지 모르는’ 자아의 파편을 정처 없이 습득한다.

에디터와 알고리듬은 정착을 모른다. 호기심을 기준으로 멀어졌던 알고리듬과 에디터는 주의력 결핍이라는 특성에서 다시 마주친다. 주의력 결핍이란 형태로 드러나는 표면 뒤에는 유한성의 망각이 있다. 우린 닮았군요. 에디터라는 직업이 잘 맞으면서도 가끔 신물이 나는 이유였다.

좁은 복도에는 거울 하나가 있는데, 그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복제한다. 사람들은 이 거울을 보고 ‘도서관’은 무한하지 않다고 추단하곤 한다. (만일 실제로 무한하다면 무엇 때문에 복제라는 눈속임이 필요하겠는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옮김)」 중 ‘바벨의 도서관’, 민음사, 2011, 98쪽

보르헤스 소설 속 문장이 알고리듬에 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지는 대상을 한없이 흩뿌려 보여주는 거대한 플랫폼의 세계.
나라는 인간은 기질이 잡식인 데다 직업적 특성이 더해지면서 플랫폼의 덫에서 더더욱 빠져나올 수 없었다. 컨텐츠 환경이 소셜 미디어로 옮겨오면서 더 심해졌겠지. 인스타그램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도 끝도 없이 다양한 대상에 관심을 갖는 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한 분야만 진득하게 파고 싶다는 열망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하지만 무엇을? 그게 가능할까?




이 책을 통해 세상의 많은 창의적인 일이란 전문지식이 아닌, 직업적 사고를 제대로 이해하고 갖추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직업은 에디터입니다.

 「JOBS EDITOR 에디터: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 , 레퍼런스 바이 비, 2019

아니다. 낯선 대상에 끊임없이 관심을 둔다는 건 일반적인 관점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만, 에디터는 해당하지 않는다. 에디터의 자질 중 하나는 주의력 결핍일지 모른다. 너무 넓은 관심사를 향한 얕은 흥미. 소재를 물색하고, 골라내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면 에디터가 아니다. 책  「JOBS EDITOR 에디터: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을 덮으면서, 비로소 에디터로서 직업적 사고를 체득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에디터라는 직업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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