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늦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잘해보자
‘게스’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강릉에서 고로케를 사려는 친구를 따라 시장 인근의 빵집으로 가던 중 게스(GUESS) 매장을 봤다. 친구는 한때 참 잘 나갔던 브랜드로 게스를 추억했다. 24인치 허리를 지닌 여성만을 위한 청바지. 현재 국내의 경우 29인치까지 사이즈를 판매 중이다. 친구는 더 넓은 소비자를 포용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색깔을 잃은 탓에 충성 고객도 잃은 것 같다는 개인적인 소회를 밝혔다.
‘게스’의 타겟은 분명 한정적인 몸매의 고객에 맞춰져 있었다. 이효리, 이하늬, 전지현처럼 늘씬하고 글래머한 모델을 앞세웠다. 당시에는 건강한 섹시미를 뽐낼 수 있는 캐주얼 아이템이 데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체할 룩이 많다. 건강함을 대변하는 애슬레저 룩이 있고, 힙합씬의 부상과 함께 성장한 스트릿웨어가 있다. 일과 후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고, 패션과 음악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 간과했다.
‘모든 몸을 위한’ 속옷이 ‘모든 감성을 위한’ 속옷은 아니잖아
편안함과 매력 모두 주변 마켓에 빼앗긴 데님을 보니, 빅토리아 시크릿(이하 빅시)이 떠오른다. 처음에 빅시의 추락은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e)’의 흐름을 놓친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의구심이 남았다. 빅시를 구매하던 소비자들이 다 ‘에어리(aerie)’로 갔을까? ‘모든 몸을 위한 언더웨어’가 ‘모든 감성을 포괄하는 언더웨어’는 아니다. 바디 포지티브를 내세운 다수의 브랜드는 몰드에 색을 입힌 단순한 디자인이 많았다. 속옷은 기능과 편안함이 우선이지만, 여전히 ‘패션’으로서의 역할도 지닌다.
맥시멀리스트는 결코 단번에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다. 퍼프소매 원피스를 갖고 싶어했던 <빨간 머리 앤> 이야기에 몰입하며 깅엄 체크에 꽃무늬 프린트를 좋아하던 이가 ‘로라로라’나 ‘마가린 핑거스’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갑자기 미니멀한 정장을 잘 뽑는 ‘로우 클래식’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오피스룩에 입을 법한 말끔한 화이트 셔츠가 대세더라도, 아일렛 소재라도 고르는 것이 이들의 마음 아닌가. 그렇다면 빅시의 고객은 다 어디로 갔을까?
펜티가 빅토리아를 죽였어요!
‘펜티가 빅토리아를 죽였어요. 그게 진짜 비밀임(Fenty killed Victoria…that’s the real secret).’ 지난해 7월 BAD YOGI라는 블로그에 올라온 글 ‘사람들이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뭔갈 사는 것에 더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7가지 이유(7 Reasons Why People Are No Longer Interested in Buying Anything from Victoria’s Secret)’에 달린 댓글이다. 빅시가 시장에서 밀려난 원인으로 오프라인 매장에 집중하는 등 유통채널에 대한 흐름을 놓쳤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었는데, 그다음으로 인상적인 의견이었다.
2018년 리한나는 자신의 이름을 건 속옷 브랜드 ‘세비지 X 펜티(Savage X Fenty)’(이하 세비지 X)를 런칭했다. 팝스타 특유의 과감한 디자인에 다양한 인종과 체형을 아우르는 사이즈가 특징이다. 브래지어 기준으로 무려 46H까지 나온다! (한국 사이즈로 대략 가슴둘레 104cm) 적어도 내 기준에는 세비지 X는 편안한 소재를 내세운 여타 브랜드보다 보폭이 컸다. 2020 S/S 뉴욕 쇼만 봐도 알 수 있다. 몸에서 뿜어나오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옮긴 퍼포먼스! 이는 동시에 세비지 X의 멋진 속옷들이 얼마나 활동성이 높은 지도 드러낸다.
종이인형 대신 입체적인 캐릭터를
세비지 X는 침실에서 쓸 수 있는 액세서리도 판매한다. 라인스톤으로 장식된 니플 패치부터 챰이 달린 채찍까지. 하지만 누구도 이를 ‘남성의 섹슈얼 판타지를 위한 제품’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데일리템부터 더 전위적인 제품(everyday basics to more provocative pieces)’에 이르는 제품군을 포괄하지만, 세비지 X는 타인을 위한 브랜드가 아닌 자신의 기분과 성향, 스타일에 기초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빅시 인스타그램으로 넘어오자. 프로필에는 ‘보여지도록 만들어진 란제리(Lingerie made to be seen)’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패션은 판타지를 먹고 산다. 세비지 X도 마찬가지다. 속옷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감의 원천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세비지 X를 구매할 때 우리는 리한나가 내세우는 ‘자신감’이라는 가치를 사는 것이다. 결국 소비는 우리가 갈망하는 가치를 대변한다.
빅시가 외면당한 이유는 그들이 주는 판타지가 해묵었기 때문이다. 패션쇼를 보자. 빅시의 패션쇼는 무대미술을 보는 듯한 재미를 줬지만, 같은 이유로 일견 코스튬플레이처럼 보인다. 엔젤들이 기본적으로 두르는 깃털이나 등에 장착한 달, 꽃, 불꽃, 낙하산 같은 장식이 움직임을 제약하는 탓이다. 이 같은 조형물들은 신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여신, 혹은 판타지 장르에서 그려진 전사처럼 익히 아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오버랩함으로써 그 같은 경향을 강화한다.
반면 세비지의 경우 ‘자신감(confidence)’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쫓음으로써 개개인의 특징을 대입할 여지를 연다. 빅시가 대중매체에서 수차례 소비된 신화 속 이미지를 답습했다면, 세비지 X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치운 빈자리를 역동적인 춤으로 채웠다. 물리적으로도 부자유한 빅시의 모델과 격한 군무를 선보이는 세비지 X의 모델이 전하는 메시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제품의 효용이 비슷하다면, 더 나은 이미지를 소비하기 마련이다. 똑같이 <섹시할 수 있다면>, 요즘 소비자들은 자신이 좀 더 능동적일 수 있는 편을 선택한다. 빅시는 그렇게 밀려났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LA를 기반으로 한 의류 브랜드 ‘포 러브 앤 레몬스(For love & Lemons)’와 빅시의 협업이 반갑다. 포 러브의 피드에는 잠에서 갓 깨어난 여성들이 속옷 위에 벌키한 니트를 가볍게 걸쳐 입고 들판으로 뛰쳐나가 한껏 아침 햇살을 맞는 모습이 가득하다. 캘리포니아의 느긋한 삶을 대변하는 브랜드의 목가적인 색깔이 느껴진다. 자연친화적인 이미지와 레이스 같은 섬세한 소재를 중심으로 한 제품이 빅시의 결과 맞아떨어진다.
브랜드의 모토는 ‘자신감, 여성성, 개인성’이다. 분명 포 러브는 빅시의 정체성을 확장하기에 좋은 파트너다. 디자인을 관통하는 정서를 유지하면서,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소비자를 겨냥하는 것이다. 몇 년 전 빅시는 광고 캠페인 슬로건으로 ‘완벽한 몸(perfect body)’을 걸었다가 문제가 되자 ‘모든 몸을 위한 하나의 몸(a body for every body)’이라고 수정했다. 비판은 모면했을지언정, 톤앤매너를 흐리면서 메시지는 한층 모호하게 만드는 결정이었다.
앞선 행보에 비하면 이번 콜라보는 자연스럽다. 늦은 감이 있지만, 잘 헤쳐나갔으면 한다. 기존에 사이즈가 작게 나온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협업 라인의 사랑스러운 속옷들에 반해버렸다는 사심 가득한 이유에서다. 빅시는 고정적인 이미지로 꾸준히 욕을 먹었지만, 한 브랜드가 사라지면 그들만의 감성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 나도 그런 사람이고. 역설적이지만, 시장의 다양성도 중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