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정지
0617
세모난 모양으로 부서지는 햇살. 콧잔등을 쓸어내리는 축축한 바람.
안녕 친구야.
해가 지고 차갑게 식은 바람이 불어오는 밤이야. 거실에선 엄마 아빠가 드라마를 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창문 밖에선 여러 겹의 개구리울음 소리가 들린다.
지난 주말에는 처음으로 집에 친구들을 초대했어. 이 구석까지 먼 길 와주신 분들에게 기꺼이 우리 집을 내어주었지. 신기한 건 전시 때 내 작품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그런 기분이랑 똑같더라구. 물론 가구보다는 집이 더 크고 일상적인 작품이지만 말이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남은 불에 나무를 태우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란히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어느 때 보다 달게 단 잠에 아침에 너무 개운했어. 매일 이 시골에 혼자 있다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니 어찌나 행복하던지.
5월 그리고 지나가고 있는 6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 여름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이제는 완전한 더위가 찾아왔어. 낮에는 마당일을 하지 못할 만큼 말이야. 얼음물을 연신 들이키게 된다.
그렇게 싸우고 논쟁을 벌였던 집 짓기도, 힘이 들어 매 순간 그만하고 싶었던 돌 고르기도. 절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짐 정리도. 모두 다 지나간 일이 되었어. 집이라는 이 공간에 구석구석 정이 담뿍 들어, 헤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연인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고, 호미로 일궈낸 마당은 초록이 되어 바람이 불면 서로 부대끼는 소리를 내기도 해. 책장의 책들은 종류 별로 정리해 둘 만큼 정리가 다 되었어. 모든 것을 차근차근하다 보니 어느새 안정된 시간들을 보내는 내가 있는 거야.
전쟁 같던 일들이 말도 안 되게 예전 같아서 조금은 웃기기까지 해. 어쩜 이렇게 빨리 잊어버리지? 이런 차분한 생활은 어떤 결말 뒤의 모습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서서히 또 조용히 찾아올 줄은 한 톨만큼도 예상하지 못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이 시간들. 정말 바쁘고 또 여기저기에 치이면서 살아왔던 시간들이 한없이 아득한 옛날 같아. 열정적인 모습의 나를 너무 좋아하지만, 다 지워내고 느긋하게 지내보니 알겠는 건, 치열함은 여러 얼굴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거야.
나는 삼시 세끼 밥을 먹는 일이 이렇게 전쟁 같을 줄 몰랐어. 해내야 하는 일들에게 바쁘게 재촉당할 때는 밥보다 중요한 것, 먹는 것보다 급한 일이 더 많았으니까. 먹는 건 항상 그다음, 혹은 나중에, 아니면 건너뛰기이기 일쑤였어.
내려와서 가족과 함께 있다 보니 혼자 대충 때우는 밥이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 먹게 되었어. 날씨와 기분에 따라 메뉴를 골라서, 아빠가 얻어오고 또 우리 마당에서 나오는 재료들로, 시간 내에 요리를 완성해서, 같은 시간에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오늘 자정에 마감되는 레포트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숨 가쁜 일정이더라고. 다 먹고 난 세 사람의 밥그릇 수저만 닦아도 소매가 흠뻑 젖을 만큼 힘들고.
먹는 것의 고단함뿐만 아니라 그저 지나쳤던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지. 놀라고 또 놀라는 시간을 겪고 있어. 그 전엔 해본 적도 없던, 새로운 일도 아닌데 말이야.
가장 중요한 것들을 비로소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만 같아. 아직 잘 못하지만 떠듬떠듬이라도 매 끼니를 만들고, 하루의 날씨에 집중하고, 내가 먹을 것을 키우고, 매일을 기록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집중하는. 천천히 조금씩 살아가는 오늘들이 숨 가빴던, 그리고 숨 가빠질, 그 사이에 있는 소중한 쉼표일 거야. 쉼표의 크기가 얼마일지, 어떤 의미로 삶에 자리 잡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잠시 멈춰진 바쁨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천천히 조금씩 살아가는 이 시간들이 어쩌면 일시정지가 아니라 다르게 생긴 재생 버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쉼표에 부딪혀 나의 삶이 굴절되었다면, 지금의 시간들은 잠시 멈춰지는 것이 아닌, 새로 재생되는 흐름이겠지.
이것저것 편지를 쓰다 보니 생각이 많이 정리된다. 두서없는 말들을 네가 가만히 듣고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너무 큰 힘이야.
너는 지금 어느 버튼 위를 걷고 있는지.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되감기 버튼을 힘차게 감고 있는지,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빨리 감기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처럼 일시정지 중인지. 혹은 멋있게 너의 삶을 재생 중인지. 늘 궁금하다 친구야. 어느 곳으로 향하든, 혹은 향하지 않고 멈춰 서있던, 너만의 치열함으로 하루를 삼켜내는 너를 응원해. 또 편지할게. 편지 끝에 너의 미소가 걸려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