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편지함

사랑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by 선들 seondeul

0927


안녕 친구야,



자연스럽게 긴팔 옷을 꺼내 들고 두툼한 이불을 덮어도 발이 시린, 눈앞은 온통 가을이야. 매일 인사하는 벼들도 속담처럼 고개를 숙이고 따사롭고 청량한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불어와. 며칠 전만 해도 햇빛에 온 얼굴을 찌푸리던 나였는데, 밖에 가만히 앉아 시린 햇살을 쬐는 것도 나름 행복한 그런 계절이 왔다.


나와 닮은 계절은 내 영혼을 가늘게 난도질하기도 하지만 또 깊어지게 해. 이런 공기에 그리워지는 건 바로 여행이야. 어찌 됐건, 여기를 떠나는 것. 여행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넘쳐서 오히려 입이 다물려. 너와 창가에 나란히 앉아 너의 여행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 싶어.



한 계절이 지나올 때까지, 매듭 이후에 나 또한 여러 일들이 있었어.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는 점이야. 아직 너에게 보낼 편지들도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속마음으론 무엇보다도 아직 더 쉬어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어쩌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에, 마음을 먹게 되었어. 모든 이유를 마다하고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곳이 여행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야.



너무나 사랑하고, 또 나를 나이게 하는 소중한 보석 중에 하나인 여행. 그래서 선뜻 마음이 갔고, 더 무서웠어.


저번 편지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게 한다’고 한 김연수 작가의 말 기억나? 나에겐 미술이 가장 그랬어. 스케치북과 색연필만 쥐어주면 엄마가 없는 거실이든, 낚시터의 텐트 안이든, 시끄러운 식당이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를 오리곤 했어. 장래 희망에는 항상 ‘만들기’ 선생님이라고 적었고, 미술시간을 가장 손꼽아 기다렸어.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제일 잘하는 장기가 되니까 그리고 만드는 일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지게 되더라구. 그림 하나를 몇 달씩 그려보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시작하고 끝내기도 하며 그런 방식으로 취미를 가꿔나갔어.


꿈을 찍던 사진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쭐래쭐래 늘 하던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술을 공부해 볼 생각이 있냐고 주변에서 물어오는 거야. 둘러보니, 다들 진로라는 걸 고민하고 있더라구. 나는 꽤 당황스러웠어. 내가 가진 취미는, 내가 좋아하는 건,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뿐인데. 이걸 공부해야 하는 그런 선택지가 있다구?


3살 때, 미술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도 쉰 적 없는 그림이었는데.그때는 정말 그림을 쉬고 싶었어. 그때는 막연히 그냥 이 취미에 주어진 재미가 이만큼이었나 보다, 할당량이 끝났나 보다 생각하며 외면하려 노력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사랑하는 놀이가 무게 있는 일로 다가오는 게, 해야 할 일로 변해 버릴까 봐 무서웠던 거야. 그걸 해야 하고, 규칙을 배우고, 해야 하는 만큼의 노력이 정해지고 하는 게 말이야.

그저 멋있는 그림을 보는 게 좋았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꿈꾸었는데. 유일한 취미가 일이 되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가장 좋아하는 게 제일 힘들게 하면 어쩌지. 그래서 사랑하는 하나를 잃어버리면 어떤 다른 내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나에겐 너무 길었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가지 선택을 양 손에 쥔 채로 정해진 답을 고민하고 있었어.



사랑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다음의 이야기야. 결국 나는 지금도 그리고 만들고 쓰고, 때론 그 일들이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기꺼이 다시 시작하고 어떻게 어떻게 끝을 내며 지내. 그리고 그런 조각들이 나를 이룬다고 생각해.


이런 시행착오와 나름의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의 선택을 결정하게 되었어. 가장 사랑하는 여행에, 퐁당 빠져보기로 말이야. 낯선 공기를 조합하고, 새로운 맛을 상상하며, 거기에 이야기를 버무리는 건 내가 너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잖아? 지금의 시간을 마법처럼 멈춘 채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그런 동화를 만들어내는 게 매일 하는 일이라니.


어쩌면 실망하고, 포기하고 또 나다워지는 한 갈래의 방법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힘들었고 그래서 행복해왔듯이, 기꺼이 시작해보기로 했어. 혹여나 이 선택이 하나의 체험으로 끝날지라도, 얼마나 값진 기회일지는 겪어내야 아는 거니까.


핸드폰 용량이 모자라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비행기 표를 살 수 있는 어플은 지우지 않는 나의 마음과 같이. 동화 속으로 떠나 이곳의 나를 바라보며, 남겨진 자리를 더 사랑하게 하는, 그런 의미로서 나에게 여행이 남아주길. 모든 낯섦이 매일 마주하는 얼굴로, 설레는 낯익음으로 새겨지길.



사랑스러움과 무서움과 기대와 설렘과 걱정을 한 아름 안고, 나는 이만 이 선택 속으로 다시 떠날게.

역시나 모든 일은 예상과 걱정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말이야. 결국 여행을 더 사랑하게 될지, 아님 꼴도 보기 싫어할지,

나도 궁금하다. 너도 궁금하지?

잊고 지낼 때쯤 다시 편지할게.

그 결과와 함께 말이야.


매거진의 이전글보낸 편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