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중한디
안녕 친구야.
눈을 뜰 때 추위에 몸서리 쳐지는 강틀랜드의 아침이지만, 오후엔 마당에 오래 서있으면 콧등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런 날씨가 됐다. 이제 더 더워질 일만 남았는데, 진득한 바람이 벌써부터 감겨오는 듯 해.
며칠 전에는 곡성에 다녀왔어. 왜인지 점점 훌쩍 떠나는 여행이 어려워져서 전처럼 자주 국내를 돌아보진 못하네.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지는 여행이 즐거워! 시간을 길게 내어 꼼꼼하게 우리나라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늘 소중한 건 곁에 있다고,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지도를 펼쳐놓고 천천히 둘러보고 싶어. 한 달간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돈 친구가 생각난다. 부러워! 느리지만 지금처럼 한 곳씩 다니다 보면 언젠간 찍어낸 점들을 이어 나를 완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역시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자!
요새는 비행기표 어플보다 자주 들어가는 코레일톡을 켜고, 기차역 목록을 보다가 ‘ㄱ’에서 곡성을 발견하고 표를 예매했어. 표를 끊고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 군청 홈페이지도 잘 되어있더라고. (하루빨리 내 홈페이지도 만들어야 하는데! 곡성에 대해 이름뿐이 모르던 내가 구석구석 잘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작은 군청보다 더더 작은 나의 공간을 조금이나마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빨리 만들게!)
선생님을 오래 하다 보면 어떤 아이가 어떻게 클지 보인다던데, 계속 떠날 궁리를 하다 보니 여행지에 대한 느낌만으로도 내 취향 일지 대충은 감이 온다. 내 감이 맞았냐 하면, 두구두구두구....
커밍쑨.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우리 집도 마을 사람들이 식구 수, 아빠 가게, 성격까지 다 아는 걸 보면 작은 곳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영화로만 들어본 곡성은 사람이 많을까 했는데, 여행안내와 돌아다닐 수 있는 버스도 잘 되어있고, 외지인에게 웃어줄 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바로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
알고 보니 나만 곡성이 좋은 곳인 걸 몰랐던 것 같더라고 머쓱하게 허허
천천히 흘러간 시간의 결이 남아있는 곳을 좋아한다면, 가속페달이 밟힌 삶의 속도를 늦추고 싶다면, 곡성에 꼭 가보라고 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즌라도이기 때문에 믿고 먹는 밥상들! 정말 실망한 곳이 한 곳도 없었어, 아 침 고인다.
가는 물줄기를 안주삼아 호떡처럼 눌러낸 바위에 앉아 지나온 주조장에서 만든 막걸리를 한 잔 마시노니, 크으.
뭣이 중한데! 정말 사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이러려고 돈 벌지.
요새 공사가 많은 강틀랜드여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조용함. 여름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는 청량한 바람, 문이 액자가 되는 도림사의 풍경, 아무도 없고 방석에서 조는 고양이뿐인 가게에서 맛본 은어, 버스를 잘못 내려 우비를 쓰고 한참 걷게 된, 비 오는 날 섬진강변의 습지, 기대보다 멋있었던 뚝방 마켓과, 진정한 지방 힙스터 곡성AA커피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친절한 사람들.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우릴 보고 3분 안에 곡성의 모든 볼거리와 관광택시 시스템까지 알려주신 유쾌한 택시기사 아저씨, 약주를 하시려다 산 밑까지 부랴부랴 데리러 와주신 한옥마을 사장님, 어떻게 이 맛있는 막걸리를 알고 살 생각을 해갔냐며 칭찬해주신 슈퍼 아주머니.
사실 지방여행을 떠날 때 기대하지 않는 부분이 사람들의 친절함인데, 아직 관광지화가 덜 되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워낙 좋은 건지, 나에겐 아직 무서운 호객행위나, 툭툭 거림 등이 전혀 없었어. 진심이 담긴 낯선 사람들의 친절이 너무 오랜만이라 곡성 사람들의 모습이 막걸리의 맛만큼이나 기억에 많이 남아.
엄마 아빠에게 맛 보여줄 막걸리 두병과 뚝방마켓에서 수염이 난 목수아저씨가 그림자처럼 앉아 너무 조용하게 깎고 있어 사지 않을 수 없었던, 나무 연필을 사들고 집으로 오는 기차를 탔어.
네가 아는 그 책상에 앉아 나무 연필로 편지를 쓰고 있다. 연필에 담긴 정성만큼, 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너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제일 재미없는 얘기가 남 여행 얘긴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해버렸다. 히히 들어줘서 고마워, 친구야. 이만 편지 줄일게! 안뇨오옹ㅇㅇ
ps. 막 내가 곡성 좋다 그래서 우주 슈퍼스타 여행지 되는 거 아녀?
김칫국 한 사바리 미리 드링킹 꿀꺽꿀꺽
과연 이 편지는 예언글이 될 것인가
ps2.
<곡성 쌀 막걸리>
기본 정보:
곡성은 11개의 읍면 가운데 7개의 읍면에 주조장이 남아 있다. 곡성의 주조장 대표들은 자기 구역 내에서만 영업하기로 약속했는데, 시장 규모가 워낙 작고 서로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끈끈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곡성 외에서는 이 막걸리를 맛보기 힘들다는 점! 맛본 곡성 쌀막걸리는 곡성 하나로마트와 기차마을 앞의 슈퍼에서 구입했는데, 곡성 읍내의 하나로마트, 축협마트, 산림마트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참고:(사)막걸리협회의 ‘팔도 막걸리 기행단’ 기사)
주조장: 곡성 합동 탁주 (전남 곡성군 곡성읍 학교로 116)
재료: 쌀(수입산) 14.5% 등등.
맛: 첫맛은 쌀을 오래 씹으면 나는 단맛이 부드럽게 난다, 다른 막걸리보다는 가벼운 맛이며, 진득함 보다는 맑은 쪽이다. 탄산이 풍부하고 곡물의 향이 강하게 난다. 머금다 삼킬 쯤엔 혀에 동글동글한 맛이 닿는데, 껍질을 앞니와 입술로 벗겨내고, 포도 알맹이만 먹을 때 나는 딱 그 맛이 난다. 포도 껍질에서 나는 떫은 쌉쌀함과 알맹이의 단 과즙이 섞인 그 맛! 삼키고 난 입에서도 포도향이 남는다. 전체적으로 맛이 강렬하다거나 공격적이지 않지만 첫맛과 끝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다채로운 맛을 가진 것이 반전 매력! 음식과 함께 먹기보다는 식전주처럼 가볍게 간식거리 하기 좋을 것 같다.
추가 정보:
추천 음악_가벼운 솔로 기악곡, 혹은 발랄한 뉴에이지.
추천 안주_ 단맛이 없고 식감이 있는 과일(감, 배, 아오리 사과) , 갓 쑨 두부(김치 먹으면 안 됨), 입천장이 까지고 목이 마른 질감의 빵(깜빠뉴, 바게트 등, 크으 빵 막!)
추천 책_ 다른 책을 읽기 전, 책 읽는 모드로 데려가는 책들. 깔끔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덮고 나면 주변의 평범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 (나쓰메 소세키_ 유리문 안에서),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_앨라 프란시스 샌더스)
추천 시음 날씨_ 초여름이나 늦여름처럼 산들바람이 필요할 때, 혹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반항심이 드는 아주 추운 겨울. 비 오는 날처럼 습기가 많거나 애매하게 추울 때는 아껴둘 것.
어때, 조금이나마 맛이 전해졌을까? 유리로 만든 막걸리 병이 정말 예쁘던데 앞으로 막걸리 시장이 더 활성화되어 여러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목이 마르다. 맛보러 곡성으로 뛰어가고 싶지!!! 나도 엉엉 앞으로 마시게 될 모든 막걸리를 이런 식으로 정리해 둬도 재밌겠다! 곧 만들게 될 노트가 있는데, 그 노트에 한 번 적어보면 세상을 좀 더 촘촘하게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얻게 될 거야. 곧 나오게 될 그 노트도 기대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