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 NOTE
다섯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종이들 사이에서 발견함.
연필이 흐려져서 사라지기 전에 옮겨 적는 5월 6일의 편지.
안녕 친구야.
거짓말같이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
나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책상 정리를 하다가 고3의 매일이 기록된 노트를 봤어.
수능 직전에 마인드 컨트롤을 하던 말들을 적어둔 노트야.
내가 DREAM NOTE라고 이름 붙인 그 노트 속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잔뜩 적혀 있어.
어둑한 독서실 책상에 앉아 딴짓이 하고 싶을 때마다
서랍에서 꺼내 들어 수능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을 적던 기억이 나.
과거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보니, 귀엽고 기특하더라.
꾹꾹 눌러낸 마음만큼 꾹꾹 쓰인 것은
야구장 가기, 밀린 드라마 보기, 동아리 들기, 여행 가기, 수업 열심히 듣기부터
차마 편지에 적기 창피할 정도로 유치한 일들.
놀랍게도 거의 달성했더라고. 노트를 보며 적혀있던 하고픈 일을 한건 아니지만,
성취율이 높은 것을 보니 그만큼 열심히 살았음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신나서 얘기했네. 뭐, 편지도 수다도 하물며
내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니! 하려던 말은, 그제는 서울에 다녀왔어.
친구들의 얼굴도 보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전시를 보러 다녀왔지.
급하게 전시 소식을 알게 되어 부랴부랴 작은 선물을 챙기고 편지를 썼어.
이곳에 내려오고 마음속으로만 쓰던 편지를 실제로 쓰려니 되게 떨리더라.
생각으로는 수십 번 이미 썼다 지웠다 한 편지는 산더미인데, 왜 이렇게 써지지 않던지.
드라마 속에서 편지를 쓸 때 그런 상투적 장면처럼
몇 장의 종이를 버리고서야 하고픈 말을 서툴게 추려 담아낼 수 있었어.
그리고 설레는 발걸음으로 전시장에 갔는데, 세상에 선생님이 계시는 거야!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게다가 무려! 아기를 안고 계셨어. 이야기만 전해 들었는데,
9개월이나 된 사과 같은 아이를 안고 계시더라고.
정말 조용히 작품을 보고 실컷 생각을 하고 선물과 편지를 몰래 두고 올 생각이었는데,
사실 그 순간부터 좀 패닉이었다. 밖이 꽤 더웠는데, 오히려 땀도 안 나더라.
엄마가 된 선생님은 처음이라 아기 얼굴과 선생님 얼굴만 번갈아 봤어.
선생님의 반가운 인사, 기억나는 건
“예쁜 다선이 왔네~ 안 그래도 어제 온 친구랑 네 이야기했어.”,
“너는 뭐 다른 sns를 안 해서 소식을 알 수가 없더라, 너무 궁금했었지.”
일단 나를 여전히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상태였어.
“얘 되게 멋진 애야. 가족들이랑 시골에 집 지었어. 다 지었니?”
“네 작품 말이야, 거기서 아버지가 사진 찍어주시던 것처럼,
나도 우리 아기가 만들게 되면 꼭 찍어주려고.”
내 꿈을, 내 작품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내가 뭘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정말 머리가 멈춘 상태였어.
제일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나의 부시래기같은 작품을 기억하는 희열이란!
물론 지도해주신 교수님이기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래 사랑은 이토록 사소한 거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커지는 거잖아.
떨려서 작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꼼꼼히 사진도 찍고 책자도 챙기긴 함) 인사를 드리고 나왔어.
전시장을 나와서 한동안 오들오들 떠느냐고 애꿎은 커피만 한 바가지 들이켰어.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너도 너의 것을 좀 해봐!”,
“하루라도 더 머리가 반짝일 때 뭐든 만들어봐”,
아기를 낳고 나니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을까 무서워서
3월부터 일주일에 하루 반씩 작업했다는 이 전시까지
모두 내 마음에 잘 새겨두려고.
링에서 내려온 사람이 되지 않도록. 빛나는 등대가 손 잡아주는 이런 행운아로서!
나도 누군가의 슈퍼스타가 되길 꿈꿔보려고. 그냥 모든 게 벅차오른다.
이 여운의 힘으로 열작업!
우연히 발견된 노트가 나에게 아련한 느낌과 열정을 주었던 것처럼,
이 편지를 미래의 내가 보았을 때! 다 이루었군, 생각할 수 있길.
해야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는
그래서 풍부하게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 먼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안테나를 바싹 세우고 너에게 이렇게 신호를 보내봐.
오랜만에 보았고, 오랜만에 보고 싶은 사람이 많다! 너 또한!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꿈을 꾸길.
안녕, 또 편지할게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