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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Oct 18. 2017

울타리가 없는 실험실

<월든> _헨리 데이비드 소로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하나의 실험이다.     

 나의 선을 찾아오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두 시간 동안 학교 안에서 찾아야 하는 MY LINE. 4학년 2학기였던 나는 강의실 문턱에 내 옆에 있는 물건들과 사물함의 잡동사니로 달리기의 피니시 라인을 만들었다. 졸업을 앞둔 나의 끝이자 시작에서 나를 지탱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나의 선은 가이드라인이었다. 교수님이 말하길, 자신이 학교를 졸업하고 가장 두려웠던 점은, 더 이상 작업을 검사 맡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좋다, 별로다, 일종의 정답 같았던 것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데다가, 많이 헤매고, 당황스러울 일이 펼쳐질 테니까.         



 어느덧 이십 대의 딱 가운데에서, 강력했던 울타리들은 희미해지다가 존재했던 자국만 남긴 채 녹아버렸다. 그만큼 대지는 넓어졌다. 울타리가 없는 실험실에 서있다. 저 멀리까지도 튼튼한 울타리가 보이는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 길이 없는 곳을 밟아가는 사람도 있다. 


 청춘은 이래야 한다는 온갖 카탈로그 앞에서, 청춘이란 말이 지겨운 청춘은 이 책을 집는다. 알량한 걱정(인척 하는 은근한 비난)을 흘려듣고 많은 사람들이 읽은 글에서 정답을 찾을 것. 실험의 가이드라인을 200년 전에 태어난 소로에게서 발견한다.           





 월든은 ‘우주의 건축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라는 광고 문고에 이끌려 주문하게 되었다. 숲 속에서 집을 짓는 건축적인 내용이나 공간에 대한 해석보다는 숲에서 지낸 이 년간의 프로젝트, 사람과의 관계와 자연의 아름다움, 경제와 사회와 같은 주제를 사색한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인간의 주요 목적은 무엇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고뇌하는 젊은 독자들을 위한 것이라던데, 어찌 되었건 제대로 필요한 독자에게 찾아온 셈이다.       


 모두들 학자 소로가 초기의 연필 제작가라는 사실에 놀란다던데, 나는 거꾸로다. <나는 연필이다>에서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소로를 먼저 알게 되었다. 가업을 이은 일이었지만, 작은 물건을 들여다보고, 사랑한 적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부족하게도 연필을 만들던 사람이란 것 외의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이 책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소로의 이미지는 젊은 감각을 가신 노교수님 같았다. 왠지 운동화를 신고 믹스커피는 안 드실 것 같은 느낌의. 알고 보니 37살에 이 책을 냈다고 하는데, 책을 읽는 내내 애정 어리게 혼난 느낌이라 젊은 나이에 놀랐다.       


 책은 그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초대장이라고 생각는데, 유독 이 책이야말로 숲 속에 초대되어, 나무 의자에 앉아 뜨거운 보리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 같았다. 이 책의 소재 대부분을 자신의 일기에서 얻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철학서로 접하기보다는 일기라고 느끼며 읽었다.      


 소로의 글은 솔직하고, 공감되고, 아프고, 웃기고, 아름다웠다. 정말 정말로 솔직해서 날카롭고 짰다. 그러다가 확 따뜻해지고 순해지기도 했다. 온도가 덜 섞인 물 같았다. 나는 무려 이런 사람이야, 라는 자만이 한 톨도 없어서, 맨얼굴 그대로였다. 그래서 더 진짜였고, 설득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며 읽었다. 2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서 쓴 책을 2017년의 추석에 내가 느타리봉에서 이 내용을 공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한 말이 아직도 모든 세대마다 통하는 것처럼, 세상만사 별반 다르지 않은 점이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특히 농사와 시골생활에 관한 부분은 수고로움에 대한 가치를, 농사지은 밭을 마을 사람 모두에게 열어두는 이웃 아저씨의 마음을 이해하게 했다.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더 부자이기 때문이다.      


이 콩들은 결실을 맺었지만, 그것을 내가 모두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콩의 일부는 마멋들을 위해 자란 게 아닐까?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농부라면 그런 걱정을 그만두고, 자기 밭에서 나는 작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첫 열매뿐만 아니라 마지막 열매도 제물로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날마다 일을 끝마칠 것이다.      


 그리고 솔직하고 신랄한 문장들은 나를 큭큭 웃게 했다. 다들 공감할진 모르겠지만, 카톡을 할 때에도 ‘ㅋ’를 남발하면서 무표정일 때가 많은데, 마치 그때처럼 책을 읽으면서 표정을 움직여 웃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웃게 했고, 나는 나를 웃게 하는 것들에게 아주 후한 감정이 든다. 솔직한 어투로 팩트 폭력을 신명 나게 잘한다. 같은 내용은 두고 요렇게 저렇게 돌려서 말하는데, 차라리 때리라고 말할 정도로 맛깔나게 비판하기 장인이다. 말로 맞으면서 가끔 뜨끔했다. 건드리기 어려운 주제도 솔직하게 풀어내서 만약 요즘 사람이라면 SNS 스타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런 강한 주장이 담긴 책이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유 있게 고집스럽고 은근히 웃게 하며 풀어내서 좋았다.         


감상적인 개혁가인 그는 건축을 기초에서 시작하지 않고 처마 돌림띠부터 시작한 격이다. 건축적 장식 안에 진리의 핵심을 집어넣겠다는 생각은 모든 알사탕에 아몬드를 넣어야 한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고, 이는 거주자, 즉 그 집에서 살아갈 사람이 직접 안팎을 만들게 하고 장식 문제는 그 과정에 저절로 해결되도록 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아몬드는 설탕 없이 먹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안색으로 칠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러면 집이 주인을 대신해서 붉그락푸르락할 테니 말이다. 오두막의 건축양식을 개량할 계획이 있다고? 누군가 내게 맞는 장식을 준비해준다면 내가 달고 다니겠다.      


부패한 선행에서 풍기는 냄새만큼 고약한 악취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썩은 고기요, 신의 썩은 고기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겠다는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내 집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입과 코와 귀와 눈을 흙먼지로 가득 채워 결국 질식시키는 아프리카 사막의 메마르고 뜨거운 모래 바람을 피하듯 필사적으로 달아날 것이다. 그가 베푸는 선행에 약간이라도 은혜를 입었다가는 그 선행에 스며 있는 바이러스에 내 피가 감염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새로운 가치를 얻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하루 세 끼 식사할 때마다 만나서 곰팡내가 날 만큼 치즈를 새로 맛보라고 서로에게 내놓는다. 그 치즈가 바로 우리다.           



 고등학교 때 나는 담임에게 촌지를 주지 않아 찍혔고, 잘렸다. 다른 모든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침묵했고, 나는 반장 임명장을 반납한 상태였다. 야자 시간에 감독을 하던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자로 손톱을 때리고, 이를 앙 물고 매가 부러질 때까지 손바닥을 때리던 선생님이었는데, 같은 어른으로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 사과에 나는 어른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했다. 물론 매를 드는 선생님을 여전히 싫어하지만, 응어리를 녹여낸 진심 어린 한마디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종류는 다르지만 그때 풀어졌던 나의 마음결이 이 책을 읽을 때도 느껴졌다. 하고픈 말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다가 조용한 일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혹은 달래는 말투로 위로를 건넬 때, 노곤하게 그 분위기에 풀어질 수 있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 경의를 표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거부하며,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중심점에서 방사상으로 뻗어가는 수많은 반경을 그릴 수 있듯이, 길은 수없이 많다. 모든 변화는 기적적으로 느껴지지만, 그 기적은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회가 이렇게 돈이 드는 놀이 비용을 대준다고 해서 학생들이 그냥 놀면서 인생을 보내거나 공부만 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살아보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당장 인생을 실험해보는 것보다 삶을 사는 법을 더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그것은 수학 못지않게 그들의 지성을 단련시킬 것이다.      


그 시절에는 무위가 가장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일이었다. 하루 중 가장 귀중한 시간을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어서 오전에 몰래 빠져나온 적이 많았다. 나는 비록 돈은 없었지만,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시간과 여름날을 마음껏 누리고 아낌없이 썼다는 점에서 참으로 부자였다. 그 시간을 일터나 교단에서 더 많이 보내지 않은 것을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어느 곳에서는 믿기지 않게 부드럽고 수려한 표현들이 있다.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월던 호수를 찬양하는 페이지는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작은 것을 만들어본 사람에게 나오는 날카로운 섬세함이 빛난다. 앞의 내용과 같은 사람이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고 아름다운 비유가 가득하다. 자연을 묘사하는 부분뿐 아니라, 오두막에 찾아오는 사냥꾼에 대해 풀어낸 이야기에서 보면, 사람에 대한 시선도 날카롭다. 누가 나를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생각만 해도 발끝이 서늘하다. 소로와 만날 일도, 말을 할 일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사람을 파악하는 방식이 역시나 신랄했다.        


캄캄한 밤, 내 생각이 지상을 떠나 다른 별들의 광활하고 우주론적인 주제에 가 있을 때 물고기가 낚싯줄을 홱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고 문득 몽상에서 깨어나 다시 자연과 연결되는 것은 참으로 야릇한 체험이었다. 나는 공기보다 밀도가 더 높지도 않은 물속으로 낚싯줄을 던질 뿐만 아니라, 다음에는 공중을 향해 위쪽으로도 낚싯줄을 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나는 말하자면 하나의 낚싯바늘로 물고기 두 마리를 낚았던 것이다.     


이런 수위 변화를 내세워 호수는 기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니 나무들은 기슭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기슭은 수염이 자라지 않는 호수의 입술이다. 호수는 이따금 입맛을 다신다.      


호수라는 거울에는 입김을 불어도 자국이 남지 않는다. 호수는 자신의 입김을 구름처럼 수면 위로 높이 띄워 보내고, 그러면 그 입김은 호수의 가슴에 잔잔하게 비친다.     


그에게는 비록 보잘것없지만 실제적인 독창성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가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도 이따금 목격했다. 매우 드문 경우였기 때문에, 그런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면 천릿길도 마다않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사회제도가 다시 생겨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머뭇거렸고,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든 남에게 내놓을만한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너무 원시적인 데다 자신의 동물적인 삶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것이 설령 단순히 학식만 가진 사람의 생각보다 유망하다 할지라도 남들에게 전할 수 있을 만큼 무르익은 경우는 드물었다.                 




 

하루의 질적 수준에 영향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활을 세세한 부분까지 잘 관리하여, 하루 가운데 가장 숭고하고 소중한 시간에 대해 깊이 관조해볼 가치가 있도록 만들 의무가 있다.      


 다시 한번 울타리가 없는 나의 실험실을 둘러본다. 살아가는 게 거대한 실험이라면, 매일을 잘 측정해서 작은 실험부터 해보려 한다. 요새는 하루를 어떻게 솔직하게 보낼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한 시간마다 기록해보기도 하고, 행동 사이에 주어지는 시간들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하고, 일주일을 원형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빠르게 해는 뜨고 또 지는 중에 지금 선택해야 할 것들이 분명하게 보인다.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돈은 어떻게 벌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린 내가 걸음마를 떼고 가나다라를 익힐 때처럼, 차근차근 나의 하루를 다시 배워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둘러 만나면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전혀 만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콩 때문에 바쁘다. 그처럼 일만 하고, 일하는 틈틈이 괭이나 삽을 지팡이 삼아 기대 서 있는 인간과는 사귀고 싶지 않다. 그 모습은 버섯 같지 않고, 땅에 내려앉아 걸어 다니는 제비처럼 몸이 똑바로 서 있는 게 아니라 뒤로 젖혀져 있다.      


 나의 콩을 잘 가꾸어야지. 아, 열심히 느끼고 써야지. 누가 알아, 160년 전에 쓰인 문장에 하루의 궤적이 더 촘촘해진 것처럼, 나의 문장도 200년 후에 발견되어 누군가에게 한 톨의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한 걸음의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다면, 뼈가루여도 축배를 들어야지. 그것은 200년 후에나 알 수 있음으로, 나는 오늘을 잘 살아내도록 한다. 언제나 오늘이 소중하니까.           


사람들은 진리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계의 변두리에, 가장 먼 별 뒤쪽에, 아담 이전에, 최후의 인간 다음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영원 속에는 진실하고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과 장소와 계기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신 자신도 지금 이 순간 절정에 이르러 있고, 모든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지금보다 더 신성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이 계속 우리에게 스며들어 거기에 흠뻑 젖어야만 비로소 숭고하고 고결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주는 끊임없이 그리고 고분고분 우리 생각에 응답한다. 우리가 빨리 가든 천천히 가든, 거기에는 우리가 지나갈 길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삶을 고안하고 구상하는 데 생애를 마쳐보자. 시인이나 예술가가 마음속에 품은 아름답고 고상한 구상은 적어도 후세의 누군가가 완성해낼 수 있었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다짐을 참 좋아한다. 작심일초일 지라도 자꾸 마음먹어야지. 엄마의 소원처럼 항상 머리는 시끄럽고 가슴은 뜨거울 것. 젊은 날 행운처럼 주어진 시간을 누리고 깊게 마실 것. 지금 할 수 있는 실험을 멈추지 말 것. 그리고 언제나처럼, 생생하게 살아낼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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