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먹어치운 스타일
그 실체보다 유명세로 먼저 접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코닥 노란색으로 칠해진 해바라기가 먼저 떠오른다. 나에게 고흐는 기형도의 안개, 비틀즈와 유재하를 좋아하는 아빠가 좋아하는 화가이다. 고흐는 가난과 불행을 그리고자 했다. 짧게 끊어지는 화필과 보색으로 대조되는 폭발적인 색채에서 느껴지듯 평생을 고독과 좌절에 시달린 사람이다. 죽기 전, 두 달 동안 70여 점의 그림을 그리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사흘 후 자살했다. 그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하면서 영화 <러빙 빈센트>가 시작된다.
공간 디자인 수업에서 처음 한 발표에서 마음이 나달나달 해지게 까인 적이 있다. 요약하자면 ‘모던’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얘기였다. 그건 컨셉이나 스타일 같은 것이지, 뭘 만들고 싶냐고 했다. 스타일과 주제를 구별하지 못하던 나는 그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야 첫 발표가 부끄러워졌다.
주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것을 만든 이유이고, 스타일은 주제를 위한 설명 수단이다. 스타일은 주제를 위한 설명 수단이다. 물론 주제를 넘는 스타일이 하나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조차 주제가 된다. 어떤 영화는 표현방식이 너무 훌륭해서 이야기가 없어도 의미 있다. 영상을 짤과 클립으로 소비하는 요즘은, 깔끔하게 정방향으로 잘라낸 인스타그램 속 일상 같은 그런 영화가 더 팔릴 수도 있다.
러빙 빈센트를 보고 남은 것은 몸집이 너무 커서 주제를 가려버린 스타일 뿐이었다. 영화의 표현방식이 이야기를 베어 먹었다. 무언가를 만들다 보면, 특히 영화처럼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일에서는 그 과정에서 무게중심을 잃기 쉬울 것이다. 나 또한 노트에 가볍게 그리는 한 장의 그림보다 가구 같이 덩치 큰 무언가를 만들 때, 완성품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놓치는 것들이 많았다. 만드는 중에는 희미해지는 숲을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스타일로 무게중심이 기운 아쉬움으로 <러빙 빈센트>를 정의 내리기에는 수많은 고생이 피눈물이 난다. 백칠 명의 화가가 2년 동안 그린 육만 이천 사백 오십 장의 그림이, 그것을 편집한 노력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1.
우선 몸집을 빼앗긴 이야기에 대해 먼저 아쉬운 점을 털어놓고 싶다. 고흐는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해서 아팠다. 그리고 유명하고 잘 알려졌다. 이러한 인물을 영화로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골라낸 지점이 ‘미스터리한 죽음’이라는 게 아쉽다. 생전 고흐의 편지를 전해주던 집배원의 아들이 주인공이다. 남겨진 편지를 전달하는 여정 속에서 주변인들을 통해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해결하고자 한다.
한 사람씩 준비된 듯이 등장한 주변 사람들의 소문들로 ‘미스터리한 죽음’이라는 주제가 풀리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왜 꼭 그의 생에 중 죽음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는지, 고흐가 죽음을 향해가며 영원한 고독을 느낌에도 붓을 놓을 수 없었던 열정이 드러났다면 좀 더 설득이 되었을 것 같다. 이토록 평면적으로 풀기에 고흐라는 사람이 가진 상황이 입체적인데. 마지막으로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도 대화의 배경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그림 자체에도 설득력이 없어서 아쉬웠다. 고흐의 시선과 감정이 모자라서 초점이 빗나가 보였다. 특히 마지막에 가셰의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이 갑자기 설득되어 나의 길을 가야지, 하며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부분과 테오의 부인이 복사해서 보내준 고흐의 편지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급하게 칼로 자른 것 같았다.
2.
이와 같이 이야기가 설득력을 잃은 가장 큰 이유는 동기가 약한 주인공에 있다. 조셉 룰랭은 평소 고흐와 동생 테오의 편지를 배달하던 우편배달부였다. 그도 아니고 그의 아들인 아르망 룰랭이 아버지의 부탁으로 술에 취해 있던 어느 날 밤,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흐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떠난다.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가장 많은 컷을 차지하기에는 아버지의 부탁이라는 동기가 약하다. 연결고리가 약한 인물이 편지 때문에 며칠씩 머물며 고흐의 죽음을 밝히고자 했는지 주인공의 설정이 아쉬웠다.
게다가 우울증이라고 매일 울고 다니는 모습은 아닌데, 그런 감정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람이 스치는 사람들의 말만 믿고 죽음을 파헤친다니.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던 고흐에 관한 단서들을 하나 씩 풀어놓을 때, 소문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듣고 사람마다 말이 다른데, 휩쓸리며 믿는 태도가 답답했다.
아르망 룰랭 외에도 가셰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고흐의 주치의로 고흐가 그린 그림도 남아있고, 집에 머물며 치료도 받았다고 한다. 고흐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모작을 한 주치의가 그렇게 질투하던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고흐를 죽음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사후에 고흐 덕분에 영원히 유명해진 사람.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인물인데, 후반부에 등장한 게 아쉬웠다.
고흐가 머물던 숙소 주인의 딸인 라부, 가셰의 딸, 가셰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술집의 사람들, 등 여자 등장인물들이 뻔한 도구적 역할로 나오는 것도 식상했다. 평생 우정을 나누던 동생이나 고흐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 고갱과의 관계들이 단서로 등장해서 새롭게 해석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3.
그다음은 영화의 표현기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모든 장면을 유화로 그려낸 애니메이션이라니! 백 명의 사람이 그림을 그린 그림이라기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작업 과정이 궁금했는데, 보니 장관이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놓고, 같은 위치에 빔을 쏘아 그리고 캡처하고 다시 덧 그리는 형식의 작업 과정을 육만 이천 사백 오십 번 거치면 된다. 이 그림들을 그려낸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고흐를 생각하며, 그의 그림을 닮고자 했을 것이다. 유화로 그려낸 그림이 노고에 비해 영화의 한 기법으로, 도구적으로 쓰인 점이 아쉽다.
4.
영화는 전체적으로 빽빽한 밀도를 자랑한다. 모든 장면이 그림이고, 고흐의 굵은 스트로크 덕분인지 일렁이는 느낌이 들어 시각적으로 피곤한 점도 있었다. 고흐의 그림 자체가 공간감을 깊게 표현하지는 않아서 배경은 조금씩 바뀌며 멈춰있고 겹쳐진 인물만 움직이는 방식이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배경도 움직이고 인물도 움직여서 잘 안 보여서 눈을 흐릴 때가 있었다. 감정연기를 하는 인물들의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면이 전환될 때, 그냥 영화는 하지 못하고 그림만이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보여서, 꼭 모든 컷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 이유를 느껴볼 수 있었다.
아르망이 고흐의 자취를 따라가는 시점이 컬러로 표현되고, 고흐가 살아있을 적에 시점은 흑백으로 표현된다. 몇몇 흑백 장면은 너무 날려 그린 느낌이 들었다. 흑백이 회상이고, 컬러가 현재인데, 오히려 영화의 주제에 맞게 고흐의 시점이 컬러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여러 사람이 그려서 그랬을 테지만, 그림의 완성도가 고르지 않아서 더 시각적으로 피곤한 느낌이 들었나 보다. 강약을 더 줘서 일정 부분은 터치를 줄여 좀 더 힘을 뺀다던가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5.
너무 멀리 있어 실제로 보지 못한 고흐의 그림들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고 한 것도 이 영화를 기대하게 된 이유이다. 스크린 비율이 캔버스 사이즈에 가깝고, 130여 점의 그림이 영화에 등장했다고 하는데, 스쳐 지나간 그림들이 많았다. 너무 많은 그림을 넣어버려서 강조를 잃었다. 몇몇 그림은 정말 미술관에서 보는 것처럼 음악도 멈추고 화면도 멈췄으면 했다. 잠깐만요, 아직 덜 봤어요 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려서 일시정지를 간절하게 누르고 싶었다. 오베르의 교회와 밤의 카페테라스 같은 그림이 지나가는 장소로 소비되었고, 특히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대화의 배경으로 나오기에는 극도의 고독감과 슬픔을 표현한 그림인데, 가장 아쉽다. 하지만 마지막에 고흐의 자화상이 스크린을 노려보며 바뀌는 화면은 그와 마주치며 이야기를 빠져나올 수 있어서 강렬함이 느껴졌다.
유화로 영화를 만들어낸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이러한 시도가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임을 믿는다. 도전을 기다리며, 러빙 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