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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Jan 26. 2018

1월 넷째 주

불화하는 말들, 반야심경, 철학 듣는 밤

<불화하는 말들> _이성복      

20  

   

글 쓰는 건 저도 피하고 싶어요. 

너무 막막하잖아요.     

 

막막하다, 할 때 이게 사막의 ‘막漠’ 자예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는 거예요.      


분명한 건, 이 막막함은 좋다는 거예요.

또는, 좋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바다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막막함,

그 막막함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수도자가 돼요.           


     

109     


번번이 힘들 거예요. 그렇지만 귀한 건 다 어렵게 얻어져요.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_텐진 갸초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존해서 생긴다는 것은 고유한 실체나 독립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모든 현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공성의 이치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 듣는 밤 1> _김준산, 김형섭     


에리히 프롬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中

인생의 목표는 삶에 열중하고 완전히 태어나고 완전히 깨어있는 것. 우리가 세상에 가장 소중한 존재이긴 하지만 벌레나 풀보다 소중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삶을 사랑하는 한편 죽음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것. 삶에서 마주하는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 혼자 있을 수 있는 한편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하나 되는 것. 양심의 목소리를 쫓고 자신에게 외치는 목소리를 따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목소리를 쫓지 않을 때,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가 진정 가책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건 내 자신은 유일하다는 사실에 양심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나는 유일한 원석이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남한테 세공을 의존한다는 거에 가책을 느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가책을 우린 쉽게 씻어버립니다. 종교로, 권력으로, 돈으로 메우죠. 니체가 보기엔 그것이 가장 퇴폐적인 행위였어요. 자유에 반하니까.      


    

<철학 듣는 밤 2> _김준산, 김형섭     


*

모리스 블랑쇼     


“너는 시도하고 있니?”라고 물었을 때 “시도했었어.”라는 과거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현재형만이 중요하죠. 시도하냐고 물었을 때 “시도하고 있어.”라는 대답만이 긍정이죠.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하는 증거예요.          


      

<반야심경> _오쇼 라즈쉬니 강, 이윤기 옮김     


-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다. 개선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디로 가야 할 것도 없다.      


-

 “모든 것 중의 하나, 하나 중의 모든 것, 이것만 인식하면, 자기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걱정할 것도 없다.”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완전한 것도 없다. 

 이 도리를 바로 보라. 바로 지금 잘 보라. 나중에 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지 마라. 

 ‘어떻게’ 같은 것은 없다. ‘어떻게’가 지식을 불러들인다.      


-

 여러분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여러분은 전부터 그것이었다. 단지 그 인식이 돌아왔을 뿐이다. 여러분은 문득 자신은 뱀에다 발을 달아주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처음부터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도.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같이 그림을 그린 친구가 있다. 비슷하면서도 배울 점도 많다. 그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갈 텐데, 출발선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릴지. 다 잘 할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설픈 조언을 했지만, 나에게도 열일곱이 있었고, 참 별거였다.

    

정신 차려보니 요 며칠 읽은 책이 다 강의하는 책이다. 시, 종교, 철학... 수업이 그립다.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몇 년 후의 내가 보면, 지금의 막막함도 지나면 뼈가 되는 그런 성분일까. 더 큰 위험, 더 큰 후회, 더 큰 선택. 쉽게 보낸 주말이 무겁다.      


주말엔 내내 쉬었다. 낮잠 자고, 맥주 마시고, 새벽에 재방송해주는 배구 경기를 봤다. 이 관성이 두려운 게 맞는 신호일지, 혹은 바빴던 과거의 나에게 남아 있는 습관 일지, 모르겠다. 수능을 앞두고 여름휴가를 떠나던 때 느낀 불안감과 닮았다. 어떤 시험 문제를 풀었는지, 몇 점이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건, 그때 계곡의 냄새, 물에 헹구어 베어 물었던 자두의 맛, 헤진 파라솔의 색감 같은 것. 이게 어떤 지표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더 잘 하고 싶다. 뭘 잘하고 싶지? 막막한 거, 그거 좋은 거라고 했는데. 분명 그런 걸 알았던 것 같은데. 이제 뭘 하면 되는 것 같은데 말이지. 책상 위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큰 컵에 커피를 마셔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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